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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월미도의 해수탕, 조탕(潮湯)

by 형과니 2023. 4. 29.

월미도의 해수탕, 조탕(潮湯)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5 11:30:08

 

인천의 근대시설(9)

-월미도의 해수탕, 조탕(潮湯)-

이영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BK21 연구교수

 

월미도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관광지로서, 또 근대 100여 년 한국 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뚝 솟은 이 섬은 말 그대로 인천의 상징이다. 월미도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닷물을 데워 목욕물로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조탕을 개발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월미도 해수풀장

 

 

# 일본기록에 나오는 월미도 풍경

 

특히,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월미도는 다른 공간과 변별되는 각별한 곳이었다. 월미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그들의 인천에 대한 기록인 인천사정(仁川事情)(1892)인천항(仁川港)(1931)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살구나무가 많아 4월 꽃이 필 무렵 인천항에서 그것을 보면 일대가 붉은 노을 같다고 지적한 전자의 경우가 틀리지 않은 것은 봄에는 앵두꽃, 철쭉꽃이 아름답게 물들이고, 여름에는 신록이 짙어가는 가운데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저녁 풍경을 볼 수 있으며, 가을에는 단풍이 비단처럼 아름다운 사계의 풍광은 그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진술한 후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월미도에 위락시설이 등장한 계기는 인천 내항의 갑문(閘門) 설치(1918)에서 찾을 수 있다. 한강에서 흘러오는 급한 물살을 막기 위해 북성지구(현 대한제분 앞)에서 월미도 쪽으로 약 1km에 달하는 2차선 둑길을 축조했다. 월미도가 유명세를 띤 것은 이 둑길 완성 후인 1923710일 남만철도주식회사에서 소형 해수풀(pool)과 공동 목욕탕인 조탕(潮湯)을 개장하면서부터다.

 

조탕의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지하 암반층에서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한 지하수를 끌어올려 이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하는 목욕탕으로 해수탕이라고도 한다. 해수탕에 사용하는 암반수에는 각종 미네랄과 염화나트륨 등이 포함되어 있어 몸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해수탕의 원조에 해당하는 것이 1920년대 월미도에 만들어진 조탕이다.

 

 

월미도조탕

 

# 국내 최고의 휴양지 명소

 

조탕 이외의 위락시설은 월미도유원주식회사에서 설비하고 관리했다. 개장 당일 동아일보 1923116일자 기사를 보면, 개장 첫날부터 500여 명이 찾아 성황을 이루는 등 1923년 조탕은 113일 동안 9598명이 입장해 3880원의 매출을 올리고 1만 원의 순익을 내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전국에 널리 알려진 휴양지인 원산의 송도원, 부산의 해운대를 제치고 월미도와 조탕은 최고의 명소가 됐는데, 봄에는 월미도 중턱을 지나는 순환도로에 만발한 벚꽃놀이로 붐볐고, 여름에는 해수욕장에 인파가 들끓었다. 이러한 여건은 월미도를 이미 1918년 풍치지구로 지정된 데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월미도해수욕장

 

 

해수욕장에는 여관, 대여 별장, 간이식당, 매점, 해수욕장, 보트 대여 등의 시설이 있어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찾아왔다. 이른바 지금의 콘도시설을 갖춘 형태였다. 특히 벚꽃이 피는 4월이면 철도국에서는 경인철도에 행락객을 위한 화열차(花列車)를 특별 운행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1925830일 기사에는 심지어 조탕에 사람이 운집하다보니 유실물을 찾아주기 위해 경찰과 언론이 나서기도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조탕과 월미도는 1924년 월미도유원주식회사 인수 이후 본격적으로 영리 목적의 시설물이 확충되어 점차 대규모 유원지로 변모해 갔다. 이에 따라 1927년에는 60평 규모의 홀을 확충했고, 이어 해변에 대형 풀(pool) 등 각종 시설을 세웠다. 예컨대 물놀이에 지친 아이들의 놀이터에는 미끄럼틀, 철봉, 그네, 씨름장 등이 있었다. 게다가 원숭이, 사슴, 노루 등 진기한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19356월에 이르러 3층 목조 건물 빈()호텔을 건립했다. 또한 1936년에는 밀물 때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설계한 용궁각(龍宮閣)이라는 일본식 요정도 세웠다. 이에 따라 개장 초 95천여 명이었던 관광객이 1935125천 명으로 증가하고 일본 패망 때까지 월미도와 조탕은 근 20년간 전성기를 누렸으나 광복 후 일본 자본이 철수하면서 영업이 중단됐다.

 

1949년 월미도관광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재개장한 월미도 조탕은 주말에 2천여 명이 모여들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지만 이듬해 발발한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그 후 월미도는 미군기지로, 다시 해군기지였다가 월미공원으로 개방됐다. 용궁각과 조탕 부지는 흔적 없이 매축됐다.

 

 

월미도해수탕

 

신문자료와 일문(日文)자료의 일부분에서 월미도의 조탕과 관련된 기록을 이해하기 쉽도록 성글게 엮어보았다.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건데 월미도는 일제강점기 때에 인천사람은 물론 인근의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던 공간임에 틀림없었다. 해수탕, 해수욕장, 호텔, 여관, 대여 별장, 간이식당, 매점, 대여 보트, 근대식의 아이들 놀이터, 원숭이, 사슴, 노루 등은 당시 사람들에게 낯설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신문기사의 제목(‘조탕에 녹은 돈’)에 나타난 것처럼 낯선 경험에 대한 대가를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다음은 에 업든 名勝이란 제목으로 개벽48(1924)에 실린 월미도 관련 기록 중 일부다.

 

이것을 보고는 웃는 사람도 잇고 아니 눈물짓는 사람도 만타. 風光이 제 아모리 絶佳하단덜 구경은 口敬이다. 아마도 其中에 웃는 사람들은 배불니 먹고 뒤짐지고 八字거름으로 그니는 그네들이 아니고 누구이랴

땅에 기운이 있듯 월미도는 지금도 관광지이다. 80여 년전의 지적이 허튼소리가 아니기에 눈물짓는 사람보다 웃는 사람들만 넘치도록 이 시대의 월미도가 조성됐으면 한다.”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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