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후 외국상인과의 상권경쟁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46:43
개항 후 외국상인과의 상권경쟁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 외국상인의 진출과 인천객주회
개항 후 인천항의 무역은 초기에는 일본이 무역을 독점했으나, 이내 청·일간에 무역경쟁이 시작됐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무역독점이 강화됐다. 또한 영국의 이화양행(怡和洋行), 미국의 타운센드상회, 독일의 세창양행(世昌洋行) 등 구미상인들도 인천에 상사를 두고 무역업을 하면서 청국 및 일본상인과 이권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일본상인은 상업회의소와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등을 조직해 인천항의 상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청국상인은 유리한 국제정세를 이용해 인천항 상권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구미상사는 선진적 경영기법과 풍부한 자본, 서양상품에 대한 독점 무역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조선정부를 상대로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 인천객주회 상상도
이렇게 인천항의 외국상인들은 거류지와 자본주의 체계, 금융지원의 각종 혜택 속에 성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인천항에서 조선상인들이 이들 외국상인과 경쟁하여 상권을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천항에는 경성, 부산, 경기, 황해, 평안도의 조선상인들이 주로 진출했다. 당시 인천항의 주요 상회사로는 대동(大同)상회, 순신창(順信昌)상회, 태평(太平)회사 등이 있었다.
대동상회는 최초의 상회사로서 1883년 개항장 인천항에 설립되었는데, 청과의 무역에서 자본을 축적한 평안도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관료도 참여했다. 곡물, 우피 등 평안도 산물을 선박을 통한 연안무역으로 판매했다. 순신창상회는 1883년 정부관료인 참의 민응식이 사장, 참의 신기선이 부사장을 맡고, 서상집, 서상옥이 직원으로 있던 일반 상회사였다. 주로 국내 상품의 수출과 구미인들을 위한 수입무역, 여관업을 했다. 타운센드 상회는 순신창상회와 서상집을 통해 조선의 내륙무역에 참가하기도 했다. 태평회사는 1885년 인천 만석동에 설립된 인천의 대표적 상인조직이었는데, 1888년에는 경상도에 지사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회사’ 또는 ‘상회’의 명칭을 사용하는 이들 상회사는 근대적 회사조직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갑오개혁 이전에는 사실상 중세적인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인천신상협회 상상도
따라서 개항장의 매매주선은 상회사와 함께 주로 객주가 담당했다. 개항장에서는 객주의 중계를 거치는 방식이 주된 거래방식이었다. 때문에 수출입무역에 종사하는 내외국상인을 상대로 매매를 주선하는 새로운 유통조직으로 객주의 활동이 활발했다. 이처럼 객주가 개항장의 유통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외국상인과 조선상인은 일정한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개항장의 객주들은 그 지방에서 성장한 유력 상인이 점포를 차린 경우도 있고,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개점한 경우도 있으며, 유력한 상인이 개항장의 객주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천항은 외국의 거대 상사들이 진출한 개항장이고 외국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객주로 대표되는 토착상인들의 대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외국상인과의 경쟁을 위해 인천항의 조선상인들은 1885년 ‘인천객주회’를 조직했는데, 특히 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본상인들의 경제 침투에 맞서서 조직된 단체였다. 그러나 인천객주회는 그 조직과 기능에 있어 아직 근대적 상인단체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 한·일 상인의 상권경쟁과 인천항신상협회
청일전쟁 이후 우세한 국제적 지위를 이용해 일본상인은 객주가 행사하던 인천항의 유통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에 대항해 조선인 객주들이 조직적인 저항을 벌이면서 치열한 상권경쟁이 전개됐다. 일본은 내륙에서 주도권을 잡고 시장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무장행상단인 ‘계림장업단’을 파견하는 한편, 인천항에서의 무역중계의 권한을 장악하고자 1896년 5월 인천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개설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조선에서 주도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관파천(俄館播遷)과 의병봉기로 일본세력은 일시 위축됐다. 이 기회를 틈타 청국상인의 활동이 재개됐고, 일본상인들은 악화된 여론과 의병의 공격으로 더욱 위축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상인들이 종래의 상권을 회복하고 이를 확장하기 위해 행상단체를 통한 공격적 상업활동을 꾀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조직한 것이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이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이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한 것은 인천항의 객주 중심의 유통구조를 일본인이 장악하고, 곡물의 가격을 이용하여 투기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설립된 한국인의 인천항신상회사와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 인천신상회사 장정
인천항 신상협회는 1897년 1월 인천에서 설립된 한국인 객주단체였다. 서상집·서상빈·박명규 등이 발기인이 되고 50여 명의 인천항 객주가 참여해 결성된 이 단체는 장정을 갖춘 근대적인 상인단체로서, 인천 지역의 관료 및 명사들이 고루 참여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일본을 비롯한 외국 상인에게 빼앗긴 인천항의 민족 상권을 회복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본을 축적하는 것으로, 특히 객주들은 신상협회 설립을 계기로 새로운 ‘상업 방식’에 따른 ‘상업 자세’의 혁신과 함께 각종 정보를 제공받음으로써 급변하는 상업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상협회는 곧 명칭을 신상회사로 바꾸었다.
신상회사는 계림장업단의 활동 비판, 부산항 일본 제일은행의 불법적 은행권 발행과 통용에 대한 비판, 재정고문의 화폐개혁으로 야기된 금융공황의 구제 건의, 학교설립운동 참여, 애국운동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신상회사는 인천항에서의 미곡유통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대금의 선불을 받지 않으면 일체의 곡물거래를 하지 않을 것”을 결의해 일본상인의 신용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인천항의 거래가 2일이나 중지되고 일본상인들이 굴복해 현금거래가 일반화된 적도 있었다.
신상회사는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맞서 민족 상인들의 상권을 지켜냈다. 그러나, 1910년 3월 일제의 민족계 상인단체 말살정책에 따라 해산되고 말았다. 일본은 수수료 등의 수취가 상업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명분으로 신상회사를 해산했지만, 이미 당시는 일본이 조선의 정치와 경제를 완전히 장악한 뒤였다. 때문에 한국상인은 일본상인이나 단체에 예속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제강점 후 1911년 신상회사는 신상협회로 부활되고, 다시 객주단합소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17년 인천물산객주조합으로 개칭하였으나, 순수 상인단체로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였다.
<※ 자료제공: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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