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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인천과 청일·러일전쟁

by 형과니 2023. 4. 29.

인천과 청일·러일전쟁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45:43

 

인천과 청일·러일전쟁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현재 인천은 동북아의 중심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은 이미 지난날 동북아의 중심도시로서

 

 

바리야크와코레츠호 침몰삽화

 

새로운 문물교류의 현장이 됐으니, 근대 개항을 통해 한··일 및 서구열강의 각축 속에 국제도시로서의 역사적 경험이 그것이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은둔(隱遁)의 나라로 알려졌던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인천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인천은 제물포 개항(1883)을 전후로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서 그야말로 최전방에 위치한 선구지(先驅地)로서 그 역사적 시련을 감당해 왔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양호사건(1875)에서부터 조미수호조약(1882)등 열강과의 조약 체결지로서 또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들이 인천과 관련돼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그 지리적·공간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 청일전쟁과 인천, 물자수송과 상륙거점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정치·경제적 대립은 더욱 심화됐고 극동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러시아가 가세하면서 동북아의 정세는 한층 복잡해져 갔다. 이같이 청·일의 갈등이 커져 가고 있던 시기인 18945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청·일 두 나라는 모두 조선에서 자신의 세력을 부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숭가리호 잔해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함 2척을 인천에 파견했으며, 이어서 육군 병력 2400명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68일에서 12일 사이에 아산에 도착했다. 청은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일본 정부에도 출병사실을 통고했다. 청 군함이 인천에 도착하자 일본 정부도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귀국 중인 주한공사 오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군함 2척을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5월부터 이미 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189465일 일본은 전시에 개설되는 천황 직속의 육해군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을 설치했다. 일본이 대본영을 설치한 시기는 청이 조선 파병을 알려오기 전이며 청일전쟁을 일으키기 훨씬 전이었다.일본은 대본영을 설치한 즉시 히로시마의 제5사단에 1차 동원령을 내렸고 이어서 제5사단 휘하 제9여단의 보병 2개 연대를 기간으로 기··공병을 합친 전시 오오지마(大島) 혼성여단을 편성해 조선에 급거 파견했다. 당시 인천 전역은 일본군의 병영이 되다시피 했다.

 

·일 양국의 출병으로 양국관계가 험악하게 되자 구미 각국의 군함들도 정황정찰과 공사관 보호를 위해 인천에 빈번히 내항하면서 인천항 중립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 각국사신회의가 3차례 개최됐으나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반대로 인천항의 중립화 문제는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청일전쟁 중 인천은 일본군의 상륙거점이자 물자보급기지로서 활용됐다. 인천병참수비대는 1894624일에 오오지마 혼성여단이 서울을 침공할 때 병참경비를 위해 보병 제21연대 제11중대와 기병 7기를 잔류시키면서 시작됐다. 인천항에 양륙되는 물자가 많아 일본조계 내의 창고에 모두 저장할 수 없게 되자 일본군은 월미도 동북단에 있는 일본 해군저탄고 부근 1만 평의 대지에 새로운 창고를 설치했다. 월미도의 일본해군저탄창고가 언제 설치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본군은 불법적으로 월미도 일부를 점거하고 저탄소를 세웠던 것이다.

 

 

제물포해전삽화

 

 

청과 협상이 결렬되자 이미 군사행동을 결심하고 있던 일본은 723일에 경복궁에 난입해 조정을 장악했다. 같은 날 일본군 연합함대는 아산만에서 청국군함에 포격을 가해 제원호(濟遠號) 등을 침몰시켰다. 선전포고 전에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장악한 일본군은 아산과 성환지역에서 청군을 격파했고 계속 이어지는 평양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면서 이후 청일전쟁의 전장은 만주지역으로 이동했다.

 

청일전쟁이 끝나자 일본인은 인천지역에서 완전히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청인들은 지속적으로 철수했는데 동순태(同順泰), 이태호(怡泰號) 등 청상들이 먼저 귀국하고, 전쟁 직전인 724일에는 청의 이사(영사)를 비롯해 속료들까지 귀국했다. 따라서 전쟁 중 인천에 남은 청국인은 200여 명에 불과한 상태였다. 그들 대신 전쟁 후 일본인 내항자가 급증했으며 전쟁 전 2500명을 넘지 못하던 일본거류민은 전쟁 후 4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 인천 앞바다 해전, 제물포 해전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국세력을 저지시킨 일본은 남하하던 러시아 세력마저 좌절시켰으니, 일명 제물포 해전으로 불리는 인천 앞바다에서의 러일전쟁(1904)이 그것이다. 러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인천항에는 정황판단과 공사관 호위를 위해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호(Variak), 코레츠(Koryeth)호가 입항해 있었다.

일본 군함은 28일 오후 제물포에 입항해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때 인천에 거주하는 7천여 명의 일본인들이 횃불을 들어 길을 밝히면서 군인들을 환영했다. 병력을 전부 상륙시킨 후 29일 일본의 함대사령관 우리후(瓜生外吉)는 러시아 영사관을 통해 바리야크호의 함장에게 최후통첩을 보내고 일본영사에게도 통첩을 보내 해전을 예고했다.

 

 

·일전쟁중일본군전사자묘지(신흥동)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의 국교단절 통고를 받은 러시아는 분명히 여순에서 인천항의 러시아 군함에 국교단절과 개전사실을 통고했다. 그러나 선전포고 이전에 공격을 개시한 일본군은 국제법의 원칙을 무시하고 조선의 기간 전신망인 경의전선과 경인전선을 전쟁 전부터 불법적으로 장악, 이 전신선을 차단해 정보의 전달을 막았던 것이다. ·일 양국이 이미 26일에 국교를 단절하고 28일 전단이 벌어졌으나 인천항의 두 러시아 군함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전투태세 역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29일 오전 10시 일본함대사령관의 최후통첩을 받은 러시아 군함의 두 함장은 협의 끝에 교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소월미도 부근에 정박 중이던 두 군함은 닻을 거두고 일본함대가 대기 중인 팔미도를 향해 항진했으며 팔미도 부근에서 전투가 전개됐다. 양측의 군함들은 약 40분간 포격전을 벌였는데 러시아 군함들은 큰 손상을 입고 패주해 다시 소월미도 부근으로 들어와 정박했다. 일본군함에 포위된 러시아 군함들은 일본군에게 함선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항복하지 않고 오후 4시경 코레츠호가 먼저 자폭하고 이어서 5시경 바리야크호가 자폭했다. 그러자 앞서 8일 상하이로부터 입항했던 동청철도공사 소속 기선 숭가리(Sungari)호도 자폭해 모두 3척의 러시아 선박들이 인천항 부근에서 침몰했다. 해전 종료 후 일본은 19043월부터 해군성 기술자 등 120명을 파견해 침몰한 러시아 군함의 인양작업에 착수했다. 19058월에 바리야크함의 인양에 성공한 일본은 이 배를 본국에 끌고 가 수리한 후 연습함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코레츠함은 인양이 어려웠기 때문에 민간인에게 무상으로 불하돼 폭파한 후 고철로 판매됐는데, 부품 가운데 몇 가지는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닻과 포탄 일부는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인천공립고등심상소학교(현 신흥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인천상륙장면

 

 

러일전쟁 후 일본인들은 190529일을 인천의 날로 정해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1930년에 인천 앞바다 해전의 주역이었던 치요다함(千大田艦)이 폐함되자 이 배의 마스트를 해군성에서 양도받아 지금의 자유공원 정상에 세워 놓았는데 6·25전쟁 때 파괴됐다.

 

최근 러시아는 당시를 기억하는 기념비를 인천 연안부두 광장에 세우고(2004) 이를 추모·방문하고 있다. 100여 년 전 조선인, 아니 인천인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발발했던 제3자의 해전을 오늘, 인천인의 앞바다에서 러시아와 일본인들의 후손들이 각각 다른 의미에서 기념하고 있으니 새삼 역사가 주는 무게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