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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최초의 서구식 각국공원

by 형과니 2023. 4. 29.

최초의 서구식 각국공원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5 11:29:04

 

인천의 근대시설(8)

- 최초의 서구식 각국공원-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응봉산 중턱에 위치한 자유공원은 인천을 대표하는 공원 중의 하나로 1888년 조성됐다. 서울의 탑골공원이 1897년에 세워졌으니, 이보다 9년이 앞선다. 이렇게 자연의 상태가 아닌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원의 시작은 근대 이후의 일로서 중세 이후 영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그들이 소유했던 수렵장이나 대규모 정원을 19세기 중반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했고, 점차 유럽 전체로 확대됐다. 런던의 하이드파크, 파리의 부아 드 불로뉴, 베를린의 티르가르텐 등이 그 예다.

 

 

# ·현대사의 격랑을 함께한 각국공원

 

 

 

자유공원은 1883년 인천개항과 더불어 근·현대사의 부침(浮沈)을 경험했던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다. 각국공원(만국공원), 서공원, 또 만국공원으로 불리다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이름만큼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로부터 운요호사건(1875)은 물론, 임오군란(1882)과 관련해 제물포조약이 체결됐고, 1883년 개항장이 돼 각국인의 집결지가 되면서 러·일전쟁(1904)의 생생한 현장이 됐으며, 가깝게는 인천상륙작전(1950)의 치열한 장소였던 인천항에서의 모든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것이 바로 자유공원이었다.

 

만들어질 당시 각국공원 또는 만국공원이라고도 불렀던 것은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국조계는 462(14만 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에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서양인들이 살았는데, 그 위치는 일본인이나 청국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일본조계가 23100(7천 평), 청국조계가 16500(5천 평)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각국조계는 무척 컸던 셈으로, 이곳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눠 구획정리사업을 하면서 러시아 측량 기사 사바틴의 설계로 이 공원을 만든 것이다.

 

당시의 각국공원은 독일계 세창양행의 사택, 각국인들의 사교클럽인 제물포구락부, 영국인의 여름별장이었던 존스톤별장(인천각), 웃터골 운동장을 넘어 응봉산 마루에 있던 인천관측소, 사이토(齋藤實)총독의 별장으로도 사용됐던 파울바우먼 주택 등 주변에 웅장한 서구식 건물이 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의 자유공원보다 훨씬 협소했으나 인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신기하고 화려한 서구식 건물들이 있었던 만큼 경관은 매우 아름답고 이색적이었다. 19244동아일보에 실렸던 인천만국공원이란 동요를 통해 당시 공원 풍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제녁 萬國國公/올너와보니/솔나무와 電線줄은/合唱을 하고/領事館 獨逸집에/유리 /한 붉은얼골로/막들우스며/저건너 바다에서/춤추는데/領事館 지붕우에/맨드러세운/저사람 혼자만은/은제보거나/무엇에 그다지도/하엿는지/한목음 말도업시/웃둑서잇네/한손에창을집고/웃둑서잇네

 

 

그러나 1910년 후 이들 조계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144월 각국조계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청국조계가 없어진다. 그 뒤 일제는 지금의 인천여자정보고등학교 자리에 자신들의 신사를 크게 신축하면서 그곳을 동공원, 각국공원은 서공원으로 개칭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서공원은 한동안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을 맞아 이곳에 맥아더 동상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공원의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꾸어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일본 거주자들이 급격히 증가하자 하야시겐조(林權助) 일본 영사는 일본 거주자들이 신궁 참배를 요구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신궁건립 운동을 전개해 지금의 인천여자정보고등학교 자리에 신궁을 건립했다. 189010월에 첫 제사를 지내고 이후 매년 511일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해 동공원(일본공원)이라 했다. 당시 이 일대는 시가지의 동쪽에 위치한 구릉으로 바로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 좋은 장소였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신궁(神宮)이 있다 해서 이 일대를 궁정(宮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 광복이 되자 인천 시민들이 이곳을 폐쇄했고, 신사를 헐고 인천공립여자상업고등학교(인천여자정보고등학교 전신)를 건립했다. 1946년 이 일대는 신생동(新生洞)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말 그대로새로 생긴 동네라는 뜻이다.

 

# 민족운동의 현장

 

 

만국공원에서 1919년 한성임시정부 ‘13도 대표자 회의가 있었으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3·1운동의 거족적인 전개에 힘입어 국내·외 각지에서는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최고지도부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민족운동 세력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초기에는 각지에서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됐다.

 

당시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한 곳은 7군데였다. 이 가운데 조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 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는 그 주체가 불분명한 채 유인물로만 발표된 전단(유인물)정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울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정부(露領政府),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해당 지역의 민족 운동가를 중심으로 수립된 것이어서 이후 통합논의를 거쳐 하나의 임시정부로 합쳐졌다.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주목되는 사항 중의 하나가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회의. 한성임시정부는 3월 초 이교헌(李敎憲), 윤이병(尹履炳), 윤용주(尹龍周), 최현구(崔鉉九), 이용규(李容珪), 김규(金奎)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면서 그 수립이 구체화됐다. 이에 따라 각계의 대표들이 4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했다.

 

이 회의는 서울, 강화, 인천, 수원 이외의 지방 대표들이 참석치 못해 전국적 대표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기는 하지만,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일종의 의회의 역할을 한 대단히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회의 참석자는 천도교 대표 안상덕(安商德), 기독교 대표 박용희(朴用熙장붕(張鵬이규갑, 유교 대표 김규, 불교 대표 이종욱(李鍾郁) 20명이었다.

 

 

한성임시정부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수립됐고,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됐으며, 정부 조직과 각료 구성에 있어 해외지도자를 총망라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계승됐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한성임시정부 수립사실이 연합통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됨으로써 국내·외에서 가장 강력한 임시정부로 부각돼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렇게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것은 개항 이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축적돼 온 인천지역 민족운동의 열기와 역량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인천의 역사 속에는 아직도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꺼리가 담겨져 있는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이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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