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기상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5 11:27:06
인천의 근대시설(6) -
-근대 기상관측의 시작, 인천 기상대-
김상열 인천시립박물관 유물조사팀장
기상관측이란 기압, 습도, 풍속 등을 측정해 대기의 상태를 파악하며 구름, 안개, 비와 같은 여러 가지 기상현상을 관측하는 일을 말한다. 농업을 천하의 근본으로 했던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기상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삼국사기』, 『고려사』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전통적인 기상관측으로 날씨(天氣)·풍향(風向)·우량(雨量)·우박(雹)·우뢰(雷動)·번개(電光)·안개(霧)·흙비(土雨)·서리(霜)·눈(雪)·무지개(虹) 등 11가지 항목에 대해 조사해 이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등에 이러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기상관측기를 사용해 정량적인 기상관측을 시작한 것은 세종 24년(1442)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우량관측을 실시하면서부터이다. 1907년까지 측우기에 의해 계량된 우량관측자료는 조보(朝報) 혹은 관보(官報)로도 일반에게 알려져서 실제 생활에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적인 기기와 장비를 통해 기상관측을 시작한 것은 1904년의 일이다. 자유공원이 위치한 응봉산(鷹峰山) 정상에 설치된 인천기상대가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시초인 것이다.
# 인천 기상관측의 시작
개항이후 기상관측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통리아문의 참의와 협판을 지낸 목인덕(穆麟德, 묄렌도르프)이 외교와 해관업무를 관장하면서 1883년 9월 1일 인천해관에서부터 연안의 정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Korean Repository”나 “Korea Review” 등 1892년 서양인 선교사들의 기록에도 기상관측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본격적인 기상관측이 시작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다.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 일본군은 한반도와 만주지방의 기상예보를 위한 기상관측자료가 필요했다. 1904년 3월 5일 일본 중앙기상대 내에 임시관측소를 설치하고 임시관측기수 15인을 두도록 했으며, 7일 제1임시관측소를 부산에, 제2임시관측소를 팔구포에, 제3임시관측소를 인천에, 제4임시관측소를 용암포에, 제5임시관측소를 원산에 두기로 정하고, 3월 8일에는 와다유지(和田雄治)기사를 임시관측과장에 임명해 임시관측소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인천에서는 4월 10일부터 하루 6회 관측이 시작됐는데, 이곳이 1883년부터 인천해관에서 기상관측을 수행해 오던 곳이었다. 비록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의 임시관측소로서 외국기관에 의한 관측이었지만 1883년 해관에서의 연안기상관측과 궤를 같이하는 계속적인 사업이 됐다.
그 후, 1907년 3월 칙령 제70호로 통감부 관측소 관제가 제정되자 통감부관측소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관측소는 각각 그 지소로 됐다. 조선정부에서도 인천측후소를 만들어 와다에게 측후소장 사무대리를 위촉했다. 이듬해 통감부 관측소를 폐지하고 당시 일본의 시설인 관측사업 및 직원을 천거해 조선정부에 위임했으며, 조정에서는 관측소 관제를 정해 각지 지소를 측후소로 개칭하고 인천측후소의 관할로 했다.
국권침탈 이후 조선총독부관측소로 개칭돼 와다를 비롯한 4명의 소장이 광복까지 관측소를 운영했다. 1953년 11월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그 기능이 축소돼 인천관측소로 개칭됐고, 1992년 다시 인천기상대로 승격해 인천지역의 기상관측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의 중구청 뒷길에 있던 스이쯔(水津)여관에 설치됐던 임시 기상사무실은 1907년 응봉산 정상(표고 70m)의 조선 황실의 땅 3만 평의 부지로 이전됐다. 최초의 기상대 건물은 2층 규모의 의양풍 건물로 외벽은 목조 비늘판으로, 우진각 지붕은 일식기와로 마감했다. 69.75평의 2층 건물 옥상에 풍력계대를 설치하고 지하에 지동계실을 보유했다. 그밖에 오의실, 관측노장이 있고, 일조계·자기강우계·백엽상·우량계·증발계·지표 및 지중온도계 등이 완비됐다. 매일 오후 3시에 일기예보를 발표하고 폭풍우신호, 정오시보 등등이 매일 발표돼 전국은 물론 일본천문대와 외국과 기상자료를 교환했다.
# 응봉산의 또 다른 이름, 오포산
인천기상대가 위치한 응봉산의 다른 이름은 오포산(午砲山)이다. 인천일본거류민회에서 관측소에 시보를 위촉해 매일 정오에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뒤 산허리에서 구식대포를 쏘면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조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포성으로 때를 알리는 것이 경제적이라 여겨 육군대신에 건의해 1908년 11월 9일부터 오포를 실시했던 것이다. 웃터골 공설운동장에서 야구경기를 관전하던 구경꾼들이나 오포를 구경하던 젊은이들이 오포소리에 놀라 껑충껑충 뛰며 박장대소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포를 쏘아 정오를 알리던 기상대의 시보는 매우 신뢰가 높았으나, 포신이 고장나 시각을 어기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고용된 오포수들은 가또(加藤) 등 3명이었다. 하루는 가또가 줄을 잡아 당겨도 대포가 터지지 않자 포구에 꼬챙이를 집어넣고 쑤셔보기도 하고, 자귀향을 두드려 보기도 했는데, 갑자기 공포가 터지는 바람에 손가락 8개를 잃게 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 1924년에는 15분이나 늦게 오포가 터지기도 하는 등 신뢰를 잃게 되자 오포제가 폐지됐다. 1925년에는 오포를 대신해 홍예문 위 인천상비소방소 감시탑에서 사이렌을 울리는 것으로 시보를 대체했다. 사이렌으로 시보를 알리는 것은 1960년대 초까지 운영됐다.
흔히 근대를 상징하는 문명을 시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해가 뜨면 일어나 생업을 시작하고, 배가 고프면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해가 지면 잠을 청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시간에 맞추어 끼니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시간과 관련된 우스운 기록이 하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 어느 민족보다 근면한 우리 민족을 언더우드는 그의 자서전에 가장 게으르고 나태한 민족으로 기술하고 있다. 개항을 통해 근대를 체험하게 된 우리 민족이 괘종시계나 회중시계가 아니면, 오포나 사이렌이 알려주는 시간이라는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아닐까.
오늘은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다. 이제 매서운 추위는 물러갔고, 아이들은 봄방학을 맞이했다. 비록 외국기관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기상관측을 시행했던 관측소를 둘러보고, 이제 봄을 준비하고 있는 자유공원을 거닐며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인천 역사를 찾아가는 시간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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