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변화(2)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49:05
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변화(2)
강덕우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910년 8월 22일 무력으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는 대한제국(한국)의 국호를 조선이라 바꾸고 종전까지 한국을 지배했던 통감부 대신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식민지 침략의 다음 단계로서 인천부의 전설과 유래가 담긴 동명(洞名)을 말살시키고 그들의 문화를 부식시키기 위해 정(町), 정목(丁目) 등의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했다. 이미 통감부 시기부터 인천의 일본거류민단이 설치된 지역에는 한국식 동리명과 함께 일본식 동리명이 수없이 붙여지고 있었다.
일본부내의 일본식 지명은 대개 그들이 떠나온 일본 지명을 그대로 붙이기도 했으나 화방정(花房町)과 같이 주한 일본 초대공사로서 한국 침략을 선도한 화방의질(花房義質) 같은 이의 인명을 붙인 경우도 있었다. 이 모두가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를 파괴·약화시키는 한편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 공업화 시도와 부역확장
▲ 1940년대 인천시가
이 같은 일본인 중심의 행정구역 개편은 일본의 식민지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확대됐다. 1931년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공업화의 시도로 1936년에 공업용지와 주택지의 확보를 위해 1차 부역(府域)확장을 단행했다. 이 해 9월 26일 조선총독부령 제93호에 의해 부천군 문학면 내 학익리·옥련리·관교리의 일부와 다주면(多朱面;다소면과 주안면) 내 도화리·용정리(용현동)·사충리(주안동)·장의리(숭의동)·간석리의 일부가 원래대로 다시 인천부에 편입된 것이다.
이어 1937년 4월 12일 총독부고시 263호로 ‘인천시가지계획’이 발표됐다. 이 계획은 1965년도를 목표년도로 설정해 인구 20만 명을 계획인구로 상정해 가로·공업용지·주택지에 관한 시가지 정비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천은 개항장 개설 이래 어느 정도 구획정리가 돼 있어 기존의 가로를 그대로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 1937년 5월에 최종안이 확정됐다. 이 때 공포한 「인천시가지계획결정이유서」에서 총독부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① 인천부는 경성으로부터 철로로 39㎞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명치 16년(1883) 1월 개항 이후 내지인이 이주하는 바가 많았고, 청일·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발전했다. 이후 항만설비가 충실해지는 것과 동시에 통상상의 입지가 더욱 견고하여 졌고…
② 제2선거의 축조에 착수하고 인천·수원선 철도가 또한 그 기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호구(戶口)에 있어서도 대정 13년(1924) 말 1만1백5십7호, 4만2천4백2십5명이었던 것이 소화 9년(1934) 말에 있어서는 1만6천5백3십9호, 7만5천5백5십8명에 달했다.…급속한 진전에 발맞추지 못하여 가옥은 통제되지 않은 채 건축되니, 장래 건전한 도시발전을 기약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써 시가지계획을 수립하여 가옥 건축의 지침으로 삼아, 장래 통제된 시가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상업·공업·주거를 각 지역으로 나누고 도로 및 교통기관을 적당히 배치하며, 주거의 분산을 도모해 인구밀도의 적정을 기해 시민의 위생·보안을 기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고, 또한 앞으로 시가의 건설에 필요한 지형들을 미리 선정해 도심지와의 거리를 고려해 두고 있었다. 우선 이상적인 거리를 도심지로 진입하는 데 1시간 이내의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로 설정했는데, 이에 근거해 구역을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 일제강점기 인천 번화가
현 시가의 중심으로 인정되는 인천우편국 부근을 중심으로 반경 6㎞의 원을 그릴 경우, 동쪽은 다주면의 중앙을 횡단해 그 서반부를 포함하며 동남쪽은 문학면 학익리·옥련리의 대부분을 포함한다. 이 구역의 동남쪽에는 문학산의 구릉이 연이어져 자연의 경계를 이루어 시가가 이 지역을 넘어서 발전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문학면 옥련리는 주택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그 해안은 속칭 송도라고 부르고 있으며 풍광이 아름다워 유람의 적지로 이름할 만하다. 현재 이곳까지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갖고 있으며, 장래 주택지 또는 위락지로 적합하므로 특히 계획구역에 편입시키는 것으로 한다.
이러한 근거에 의할 때 인천우체국으로부터 가장 먼 곳은 다주면 사충리와 간석리와의 경계까지이며 그 거리는 26분, 문학면 학익리와 문학리 사이의 경계까지는 25분, 옥련리·연수리의 경계까지는 45분이 걸리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 때의 인천시가지계획 역시 일본 경제인이 중심이 된 도시계획사업으로 결과적으로 한국인을 도시에서 추방해 버리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 경인시가지계획
이어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을 그들의 침략전쟁 목적에 맞도록 교통의 요지인 경인지구를 중공업과 군수공업지대로 지정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른바 ‘경인시가지계획’을 1940년 1월 19일 총독부고시 제25호로 공포했다. 이 계획의 주된 내용은 이미 시행되고 있던 경성시가지계획 구역의 서남 끝에서 인천시가지계획 구역의 동북 끝까지 7개의 공단과 11개의 거주지를 건설하고, 식량공업기지로서 김포평야와 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묶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이처럼 방대한 지역을 시가지계획으로 추진한 배경에는 경인지구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조건과 함께 산업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 즉, 당시 한반도의 식민지적인 산업개발을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식산은행의 자본을 중심으로 1939년 2월에 설립된 한강수력발전주식회사가 북한강 상류인 화천과 청평에 댐을 축조해 최대출력 12만kw의 전력을 생산한다는 계획이 진행되자, 같은 조선식산은행 계열의 일본고주파중공업의 인천공장(공장부지 약 660만㎡)이 부평에 입지하고, 또한 바로 이웃해 일본 육군의 대전차공장인 인천조폐창이 입지하게 됐다.
이에 따라 위의 두 대규모 공장과 직접·간접으로 연관된 산업들의 입지신청이 경인지역에 쇄도해 대량의 공업용지 확보가 불가피하게 됐던 것이다. 그리해서 이처럼 대규모 공장입지의 결과로 필연적으로 초래될 인구의 집중에 대비해 주택용지를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국토계획선에 따라 배분할 것인가 하는 목적이 대두됐다. 또한 이와 같은 공업용지와 주택용지 이외에 아무런 지정이 없는 지역을 절대농지와 절대녹지로 지정해 시가지의 불합리한 연쇄팽창을 막고, 김포평야의 광대한 기름진 땅을 식량공급기지로서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 전쟁 막바지의 인천항
그러나 이처럼 방대한 경인시가지 계획은 그 계획 자체가 너무나 광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체제하의 물적·인적인 제한으로 원래의 계획에서 크게 후퇴해 실행됐다. 이에 따라서 1940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40호의 경기도령 제5호에 의해 부천군의 서곶·문학·남동·부내 등 4개 면이 인천부에 편입돼 인천부는 옛 인천부역의 대부분과 옛 부평지역을 포함하게 됐다.
이로써 인천부는 1910년의 부역, 곧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에다가 부평군까지 차지하는 넓은 부역을 갖게 됐다. 개항 직후 제물포 중심의 작은 항구도시·상업도시였던 인천사회가 거대한 항만도시이자 커다란 중공업단지와 농업단지를 배후에 두는 산업도시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됐고, 이에 따라 부평과 인천의 기능적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해 인천 공간구조의 기본 틀을 형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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