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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인천 축항(築港)

by 형과니 2023. 4. 29.

인천 축항(築港)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50:07

 

인천 축항(築港)

강덕우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개항 초기 인천항과 잔교 설치

 

 

갑문기초공사(1914)

 

 

인천항은 조선 초기 제물량에 수군 만호영이 설치돼 서해의 방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수도 서울에 인접한 입지적 조건에서도 군항이나 상업항으로서의 임무를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 7(1656) 제물량이 강화도로 옮겨감에 따라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 놓이면서 항구로서의 개발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개항 당시 제물포항은 이미 개항된 부산이나 원산보다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다. 서해안이 원래부터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큰 데다가 인천은 그 차이가 10m나 되었기 때문에 배가 접안하기 위해서 만조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인천항 개발의 첫 삽을 든 것은 개항(1883) 직후인 18849월 인천상인단체의 출자에 의해서였다. 다음해 8월까지 1년여에 걸쳐 인천해관의 러시아 토목기사가 공사를 맡아 15~16명의 인부를 동원해 현 파라다이스 호텔 언덕 아래 해관 자리 앞 해안에 석축을 쌓고 잔교(棧橋 : 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놓은 다리) 1기와 돌제(突堤 : 육지에서 강이나 바다로 길게 내밀어 만든 둑) 1개를 만들었는데, 항만로서는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했다.

 

이렇게 항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항 이후 인천항에 출입하는 외국 선박이 날로 늘어나 정기 운항선이 개설됐다. 개항 당년인 1883년 초부터 정기항로를 개척한 것은 청국의 상해 초상국이었다. 상해 초상국은 상하이~나가사키~부산~인천 간의 항로를 개척하고 매월 1회 또는 2회 소속 기선 남승호(南陞號)를 취항시켰고, 여기에 자극받은 일본 해군의 어용선 숙미환(宿彌丸)과 대판협동상회 소속 기선 진서환(鎭西丸), 범선 제2동복환(同福丸)이 같은 해 413일 입항했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일본의 미쯔비시 기선회사가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를 개설하고 고오베~나가사키~쓰시마~부산 간의 항로를 인천까지 연장해 엄동인 1월을 제외하고 매월 1회씩 정기우편선을 운항했다. 그리고 188410월 상해 초상국 소속의 정기선 남승호가 종항한 후에는 인천항의 수출입품을 미쯔비시 기선회사의 정기선이 도맡아 운송하게 됐다. 미쯔비시 기선회사는 공동운수회사와 합동해 일본우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885101일에 인천출장소를 인천지점으로 승격시켜 영업을 계속했다. 이듬해 지금의

 

개항초기 인천항과 잔교

 

해안동에 사무소와 창고를 신축했는데 운항횟수는 1890년까지 매월 2회였다고 한다.

그러나 빈약한 시설로 날로 증가하는 수출입 물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1893년 두 번째 개발 사업으로 영국인 기사 챔버스의 설계에 따라 해관 앞의 바다(현재 파라다이스호텔 남쪽 도로)를 메워서 그곳에 돌제를 축조하는 한편, 소월미도 동쪽 끝과 팔미도 서쪽 끝에 등대를 설치하는 등 항로 표지시설을 갖추었다. 이 역시 항만개발이라 이름 붙이기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당시 해관 앞 부두를 출발해 마포까지 가는 기선이 매일 운항해 인천~경성 간 수로교통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 인천축항과 갑문 설치

 

인천항은 청일전쟁(1894) 이후 미곡 반출의 창구로서 이용해 왔기 때문에 투자가 집중돼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수도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경인철도의 개통(1900)으로 무역액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05)이 끝난 후 인천항뿐만 아니라 모든 항구에서의 무역량이 급증하게 되자 전국의 항만시설 개선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인천항도 1906년부터 6개년 연차사업에 착수하게 됐고, 1912년까지 부두확장과 세관시설 정비, 내항의 준설공사 등이 진행됐다. 그리고 이와 함께 19094월부터 3개년 계획으로 준설(浚渫:물의 깊이를 깊게 해서 배가 잘 드나들 수 있도록 하천이나 항만등의 바닥에 쌓인 모래나 암석 등을 파내는 일)공사에 착수해 수로를 개척했으나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처음의 공사지가 다시 매몰되는 형편이었다.

 

완공된 갑문(1917)

 

 

거기에 더해서 경부선 철도의 개통(1905) 이후 인천항은 점차 물동량에서나 항만시설에서 부산항에 추월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항구적인 항만시설을 갈구하는 여론이 비등해 만조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대소선박이 입항할 수 있고 또 필요하면 언제나 짐을 부릴 수 있는 도크(선거·船渠)를 요구하는 소리가 간절했다. 이에 누차에 걸쳐 수천 명의 인천시민 연서의 축항청원서를 탁지부(재무부), 내무부 및 통감부 요로 당국에 제출했다.

 

그러나 10m를 넘는 조수간만의 차는 인천항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였고, 이에 따라 1911년부터 항만의 설비확장공사를 실시했다. ‘1기 해륙연락설비확장공사로 명명된 축항계획은 ‘2중갑문식 선거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선거(船渠 : 선박의 건조나 수리 또는 짐을 싣고 부리기 위한 설비) 구축을 위해 사도와 세관매축지 남쪽에서 오늘날 인천여상이 자리잡고 있는 동산에 이르는 해면을 매립하고, 선거는 이 매립지 중앙을 굴착해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해서 이곳에 4500t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크기의 인공(人工) 항만 제1선거 축조를 시작했다. 이 항만은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도크 공사로 착공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큰 관심을 끌었으며 공사 시작 7년여 만인 191810월 완공됐다.

 

이어 내항(內港)으로 토사가 밀려들어 쌓이는 것을 막고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1917년 시작한 월미도 제방축조 공사가 1923년에 끝남에 따라 인천항은 전천후 상업항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됐다.

 

당초 축항계획은 무역진전의 추세에 비추어 연간 60t의 물동량을 처리할 목표를 세워 완성한 것이었으나 선거 축조공사가 완공된 다음해인 1919년의 인천항의 무역량은 이미 632906t에 이르러 계획량을 초과했다. 이러한 물동량 증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돼 세계무역이 활발해진 데도 원인이 있으나 그보다는 선거 구축으로 인천항의 하역능력이 크게 향상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무역량 증대에 따른 출입선박의 폭증으로 항만의 협소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높아져서 인천항은 선거 구축 후 즉시 이에 대한 확장 문제가 대두됐다. 더구나 겨울철에는 진남포, 신의주 등 서해북부 일대의 중요 항구들이 동결되기 때문에 인천항에 대한 의존도가 가중되었으므로 확장의 필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시급한 과제로 제기됐다.

 

이에 1929년 내항의 준설과 선거 확장 등 설비확장공사가 착수되고 1935년 준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리해서 인천항은 선거 내에 4500t급 선박 3척과 2t5척의 동시 접안이 가능하게 됐고 연간 하역능력도 80t으로 늘어나게 됐으나 이 또한 급증하는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준공한인천선거(1918)

 

# 병참기지와 제2차 축항계획

 

1930년대 후반 경인공업지대를 병참기지화한 일제는 이에 필요한 적절한 공업항을 물색하기 위해 인천항 북부에 대한 수로조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월미도 서부에서 율도 북쪽에 이르는 수로는 대형 선박의 정박이 항시 가능한 수심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면한 북해안에는 광대한 간석지가 발달돼 있음을 알게 됐다. 따라서 이 간석지를 매립해 광대한 공장지대를 형성하고 이로부터 경인공단지대와 연결하면 자유로운 공업항으로서의 천연의 양항이 될 수 있음이 판명됐다.

 

그래서 1935년 계획을 수립, 1936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6개년 사업으로 인천 북항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북항공사는 1938년에 총독이 직접 순시할 정도로 공사가 중시되고, 당초 계획을 변경해 100만 평에 달하는 공업지대를 조성한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등 전국이 전시하 통제경제체제로 변화되면서 중단됐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