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과 학생운동
仁川愛/인배회
2008-06-03 11:54:48
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과 학생운동
견수찬 인하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 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
▲ 내리교회 학생들의 군사훈련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주춤해지자 인천에서는 민족운동의 열기가 고양되고 각종 조직이 설립돼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인천의 청년운동도 전국적인 민족운동의 열기에 발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는데, 3·1운동 이후 1924년 4월까지는 주로 민족의식의 고취와 친목도모, 사회봉사 등을 위주로 하는 민족주의 혹은 계몽주의 청년운동이 전개됐다. 이후 1924년부터 1927년까지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조류로 사회주의가 등장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청년운동이 활발했고, 1927년 이후에는 민족운동의 이념지향을 뛰어 넘은 통일적 청년운동이 전개됐다.
이 같은 청년운동의 흐름 속에서 인천·강화지역의 청년운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1920년대 초반 인천지역의 청년운동은 엡윗청년회·인배회·한용단 등을 중심으로 강연·토론 등을 통한 지식계발, 체육활동을 통한 체력증진, 풍습개선 등의 활동을 주로 하는 민족주의적 청년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23∼1924년경부터 점차 사회주의적 성격의 청년운동이 나타나게 됐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제물포청년회가 1923년 말 발기된 이래 인천무산청년동맹, 인천화평청년단, 인천여자청년동맹, 인천청년회, 인천청년연맹 등 사회주의적 성격의 단체들이 창립돼 활동했다.
1924년 이후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청년운동이 확산되면서 청년운동의 연합체로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고 지방대회를 통해 각지의 청년운동연합체 결성이 추진되자 인천·강화·개성 등 지역에서도 각 지역 청년회를 합해 연맹을 조직했다. 이에 따라, 인천청년연맹의 주도로 1926년 3월 27일 인천에서 경기도청년연맹이 창립됐다.
▲ 내리소년척후대
1927년 이후에는 청년운동이 이념대립을 넘어 통일적 운동을 지향하게 되면서 각 지역에 있는 청년회 및 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청년동맹과 청년동맹지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인천에서도 1927년 9월 25일 인천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인천청년동맹을 창립했다.
이후 청년운동은 종래의 계몽적·문화적 운동에서 더 나아가 정치적 운동을 표방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해 더욱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통해 활발히 전개되던 청년운동은 일제의 강압과 극좌적 해소론에 밀려 1931년 조선청년총동맹이 해제되면서 급격히 약화됐다.
일제강점기에 청년운동을 주도한 인천의 청년운동조직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청년들이 운동단체를 조직하고 다양한 민족운동 전개한 것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일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역량을 강화해 해방 후 새로운 국가건설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 일제강점기 인천의 학생운동
3·1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식민통치에 적극 저항하는 항일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뜬 학생운동은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에 국내에 유입되면서 이념적으로 무장하게 됐고,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연계 속에서 다양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학생운동은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과 같은 항일만세시위와 각종 동맹휴학, 비밀결사를 통한 항일독립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을 통해 다양하게 민족운동에 기여했다.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에서도 민족의식에 눈을 뜬 학생들의 일제의 식민지교육과 차별에 반대하는 동맹휴업투쟁이 맹렬히 전개됐다.
▲ 영화남학교의 고적대
인천공립상업학교의 학생들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11일 일어과목 폐지 등을 주장하면서 동맹휴업을 감행한 데 이어, 1923년에는 일인교사 구보다의 교수 내용과 교장 무카이의 전횡에 대해 동맹휴업을 재차 단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남칠·최병한·이의연·이상의·이기봉·최봉도 등 맹휴의 주도자들이 퇴학당해 끝까지 복교되지 못했다. 1929년에도 광주학생들의 항일투쟁에 자극돼 또 다시 동맹휴업이 단행됐다. 이렇게 인천공립상업학교의 동맹휴학은 식민지교육을 반대하고 항일민족운동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전개됐다.
인천체신국 소속의 해원양성소는 일제가 학급선원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한인위주의 실업학교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일본상선학교와 비교해 볼 때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과 사회진출에 상당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인학교 학생들은 민족적 열등감을 조성하는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에 대해 반발하게 됐고 이는 동맹휴학으로 발전됐다. 인천해원양성소의 동맹휴학은 1925년 2월 2일 1학년 한인학생 30여 명이 중심이 돼 단행됐다.
전날 1·2학년생 40여 명은 인천해원양성소의 질을 일본상선학교와 같은 수준으로 승격시킬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인천해원양성소 소장 이노우에는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 2월 9일 27명을 무더기 정학시키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가 강경해지자 학교당국은 퇴학처분과 함께 일본 경찰을 앞세운 대대적인 탄압으로 대응했다.
강화의 길상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들도 1926년 5월 2일 몰지각한 일본인 교사 배척이유를 들어 전원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문제의 발단은 4월 30일 이 학교 6학년 학생들이 순종황제 승하비보를 듣고 이에 대한 봉도를 위해 팔에 상장을 달고 등교하면서 일어났다. 이를 본 이쿠타 교장과 스토우 교사는 즉시 상장을 뗄 것을 요구했으나, 학생들은 선생의 부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겠다고 거부했는데, 이에 두 일본인
▲ 한용단
교사가 이인무·김성동·고효순·김갑룡 외 10여 명을 서무실로 불러 마구 구타해 심한 부상을 입혔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5·6 학년생이 똑 같이 상장을 달고 등교하는 것을 본 일본인 교사가 이들을 또 다시 구타하자 5·6학년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의 배척을 요구하며 맹휴를 단행한 것이다. 학생들의 맹휴소식에 학부형들은 긴급 학부형회의를 개최하고 포악무도한 일본인 교장과 교사를 규탄했고, 그 결과 당시 강화군수 송문화가 학교에 찾아와서 폭행교원에 대한 처리를 약속하고 나서야 학생들의 복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의 동맹휴업은 5학년생 70여 명에 의해 1825년 6월 23일에 단행됐는데, 이유는 교사의 교육적 자질문제에서 비롯됐다. 문제의 발단은 신임교사 이기하가 평소 1시간용 실습시간을 임의로 늘려 학생들의 귀가를 늦게하고 이에 반발한 5학년생을 몇시간씩 교실에 붙잡아두며, 반발을 주동한 반장을
▲ 항일운동의 산실 웃터골운동장
퇴학시키려 한 데서 일어났다. 순수한 학내 문제에서 발생한 동맹휴업이었기에 다음날 학교측의 권유로 복교가 이루어지면서 민족운동 차원으로까지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52)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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