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3·1운동과 만국공원 회합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51:20
인천의 3·1운동과 만국공원 회합
견수찬 인하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 인천의 3·1운동
▲ 독립선언서
일제의 국권침탈 이후 숨죽였던 민족운동은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폭발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기점으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돼 갔고, 해외동포들도 각지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인천에서도 이러한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인천, 부평, 강화, 용유, 덕적 등에서 수많은 군중이 독립만세시위운동에 동참했다.
인천의 3·1운동은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의 동맹휴업에서 비롯됐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 6일부터 9일까지 4일간 동맹휴업에 들어갔으며 이로 인해 교직원들은 각각 자기 학교의 상황을 경찰에 보고해야 했다. 이에 반발을 일으킨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 학생 김명진·이만용·박철준 등은 학교와 경찰이 연락하는 전화선을 끊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경찰이 곧 연락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3월 8일 오후 9시경 우각동(牛角洞)에 있는 인천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전선 절단용 가위로 2층에 가설해 놓은 실내 도입 전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박살냈다. 이 일로 인해 김명진은 수화기 횡령 사건이란 죄명으로 형법 제 254조에 해당해 부정형중징역형(不定刑中懲役刑)이 선택되고, 가택침입이 형법 제130조와 통신장애로 전신법 제37조에 해당하는 여러 죄명을 붙여 무거운 형에 처해졌다.
▲ 인천공립보통학교 김명진 판결문
3월 7일부터 만세시위가 시작돼 3월 8일에는 시내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기에 이르렀다. 3월 9일에는 만국공원과 시내에서 수백 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해산됐고, 3월 10일에도 시민과 학생 수백 명이 모여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인천의 상인들 또한 민족운동에 고무돼 상점철시운동을 전개했다. 3월 27일 조선인들의 가게에 비밀리에 조선독립신문이 배부됐으며, 만세를 부를 것과 철시할 것에 대한 격문이 날아들었다. 이에 조선인 상점들이 철시에 가담하자, 일본경찰이 출동해 개점하라고 협박했으나, 상인들은 일시 개점했다가 다시 철시하는 방법으로 항쟁을 계속했다.
부평에서도 3월 13일 소사, 소래, 계양의 주민 수백 명이 만세시위에 동참했는데, 소래면과 계양면에서는 수백 명이 소래산에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으며 읍내에서도 수백 명이 산에 올라가서 만세를 불렀다. 부평 장날이던 24일에는 청년들의 주도로 시위대가 부평면사무실을 파괴했다. 이에 일경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해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며칠 후에도 소사정거장에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주안과 소래로 행진했다.
강화의 3·1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1개월간 강화 13개 면 전지역에서 일어났다. 강화에서도 가정 먼저 만세시위에 나선 것은 학생들이었다. 3월 12일 오전에 강화보통학교 학생들이 칠판에 태극기를
▲ 인천공립보통학교의 이만용
그리고 만세를 부르다 저지된 데 이어, 13일 다시 100여 명이 학교 안에서 만세를 부르다 경찰에 연행됐다. 이어 3월 18일 강화읍내 장터에 모인 군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행진했다. 3월 19일에는 만세시위가 길상면 온수리를 기점으로 두운리와 교동면·삼산면·서도면 등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24일에도 교동주민 100여 명이 교동향교, 면사무소 옛 관아터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7일에는 강화 9개 지역에서 2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시위형태도 과격해져 각지의 시위군중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돌을 던지고 친일파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자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했다. 3월 29일부터는 독립만세운동의 양상이 야간 횃불시위의 형태로 변모돼 4월 1일에는 강화읍, 송해면, 양사면, 하점면 등 13개소의 봉화를 연결하는 횃불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덕적에서는 4월 9일 학교운동회를 기해 학생 50여 명과 학부형 30여 명이 해안에 집합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독립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했다. 용유에서는 3월 28일 150여 명의 군중이 관청리 광장에 모여 큰 태극기를 중앙에 달고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을왕리에서는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관청리를 향해 행진하기도 했다.
▲ 인천공립보통학교제1회졸업생
# 만국공원 회합과 한성정부의 수립
3·1운동의 성과와 그 교훈으로 말미암아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운동세력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초기에는 각지에서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한 곳은 7군데였는데, 이 가운데 조선민국임시정부·고려공화국·간도임시정부·신한민국정부는 그 주체가 불분명한 채 전단으로 발표된 ‘전단정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정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은 해당지역의 민족운동가를 중심으로 수립된 것이어서 이후 통합논의를 거쳐 단일한 임시정부로 수렴됐다.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주목되는 사항 중의 하나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회의’라 할 수 있다. 한성임시정부는 3월 초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현구, 이용규,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면서 그 수립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각계의 대표들이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할 것을 결정했다. 이 회의는 서울, 강화, 인천, 수원 등의 지방 대표들밖에 참석하지 못해 전국적 대표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일종의 ‘의회’ 역할을 한 대단히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회의 참석자는 천도교 대표 안상덕, 기독교 대표 박용희·장붕·이규갑, 유교 대표 김규, 불교 대표 이종욱 등 20명이었다. 이어 4월 중순에는 안상덕·현석칠 등의 발기로 국민대회를 소집하기로 해 13도 대표를 서울 서린동 봉춘관에 모아 협의했고, 4월 23일 봉춘관에 ‘국민대회’ 간판을 걸고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조로 된 약법과 임시정부령 제1호를 발표했다.
▲ 창영학교의 3.1운동기념비
한성임시정부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서울에서 수립됐고,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됐으며, 정부조직과 각료구성에 있어 해외지도자를 총망라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계승됐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한성정부의 수립사실이 언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됨으로써 국내외에 가장 강력한 임시정부로 부각됐고, 그래서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했다.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것은 바로 3·1운동으로 분출된 인천지역 항일민족운동의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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