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 염전 / 국내 최대의 천일염 산지
한국 최초의 천일염 산지였던 주안(朱安) 염전의 광활한 모습.
인부들이 소금을 채취하고 있다.
주안 염전 / 국내 최대의 천일염 산지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아침저녁으로는 한기마저 찾아들고 하늘도 높고 푸르러졌다. 60년대식 인천 정서로 말한다면, 낙섬이나 주안 염전에 순백의 소금이 쌓여 가는 그런 풍요의 계절이다. 여기저기 봉곳이 솟아 있던 소금더미들과 창고가 어우러진 모습은 인천의 이색 풍물이자, 청정(淸淨)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위에 염전이 사라진 지도 꽤 오래인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인천의 소금 산지는 원래 서구와 계양구 해안 일대였다. 여기서 생산되는 소금은 곡식이나 돈보다 얻기 어려운 귀물이어서 그 옛날 인천 경제에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항 후에는 인천의 염업(鹽業) 사정이 퍽 달라졌다. 값이 싸고 순도가 높은 중국산 암염(巖鹽)이 밀려들어 국내산은 고사 직전까지 몰렸던 것이다.
조정은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07년 주안(朱安)에 1정보 가량의 천일 염전을 시험적으로 축조했다. 그 해 9월 23일에는 이완용 등 여러 관리들이 주안 염전을 시찰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는데, 시험 결과 부산에 설치했던 재래식 염전보다 경제성이 훨씬 뛰어났다. 이를 계기로 조정은 자급자족을 위해 재래식 염전을 모두 천일 염전으로 바꾸었다. 천일 염전 시대가 인천에서 열린 것이다. 조정은 3차에 걸쳐 주안, 남동, 군자에 1천1백15정보의 직영 염전을 확장했는데 여기서 국내 생산량의 50%가 넘는 15만여 톤이 생산됐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을 잃자, 소금의 유통도 일제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1903년 조선총독부는 우리 상인들의 유통망을 와해시키기 위해 급기야 천일염 제조 허가제를 실시하였고, 전매국을 두어 도매, 소매 행위까지 통제했다. 1942년에는 한술 더 떠 전매령을 실시해 소금에 관한 이권을 완전히 빼앗아 가고 말았다.
이 같은 일제 수난기를 거쳐온 인천의 천일 염전은 광복 이후 1960년까지만 해도 여러 곳에 건재했었으나 주안 염전과 "개 건너" 염전은 경제 개발 정책에 따라 공업 지역으로 바뀌었고, "낙섬" 염전은 해수면 매립 사업으로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육지가 되어 버렸다.
그 아름답고 광활했던 풍광이 이처럼 삭막하게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미군 저유소 앞 저수지를 해수욕장으로 애용했던 낙섬' 염전이나 초등학교 시절 '사회 시간' 에 '우리나라 최대 천일염 산지로 자랑스럽게 외웠던 주안 염전을 돌아보자면 이제는 추억 속의 아스라한 둑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세태도 많이 변했다. 소금 사업이 민영화되고, 값도 뚝 떨어져 요즘은 유사 이래 소금 귀한 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 자연산 소금이 건강에 좋다며 너도나도 찾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인천 원산(仁川原産) 천일염 이 소금의 왕자' 였다는 생각이다.
▲ 1960년대까지 소금을 생산한 남동염전.
답차(사람이 발로 돌리는 수차)로 바닷물을 끌어 올렸다.
▲ 주안염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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