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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염전이야기

인천 소금

by 형과니 2023. 3. 20.

인천 소금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0 04:13:47

 

인천 소금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인천하면 곧장 소금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 최초로 천일염을 제조한 곳이었기 때문에 소금이라는 말이 차라리 인천을 지칭하는 별명처럼 붙었던 때였다.

 

1907년 일본인들이 주안에 염전을 만들어 시험 제조에 성공한 뒤 남동, 소래, 군자 등지에 이르는 방대한 지대에 염전을 축조했으니 인천과 소금이 자동으로 연상될 만도 한 것이었다.

 

물론 인천 짠물운운하는, 듣기에 다소 곱지 않은 별칭은 개항과 광복, 6.25 사변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을 때마다인천 땅에 밀어닥친 외지 유입 인구와 함께 각박해지는 인심을 빗대던 칭호라고 하겠는데, 그것이 마침 소금물로 상징화되었던 것이다.

 

인천이 전국 최대의 염전 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기후 조건과 함께 잘 발달한 갯벌 때문이었다. 이미 소금을 인천 지역 토산물의 하나로 꼽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생산지인 염소(鹽所)가 인천 6, 부평 7, 강화 11, 교동 3곳 등 총 27곳이고 기록한 점으로 보아 인천 일대가 해수를 끌어들이기 쉬웠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숫자는 당시에도 경기도 전체의 약 30%, 전국적으로는 약 10%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였다.

 

1918년 주안염전, 21년 남동염전, 25년 군자염전이 증설되면서 1932년에는 총 면적이 1115정보에 달해 전국 생산량의 절반인 15t의 소금을 생산한다 서곶(西串) 지방에만 염세(鹽稅)를 바친 업자가 100명에 가까웠다는 기록으로도 인천의 소금 생산이 참으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인천시사에는 1930년 인천염업조합 소속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을 선언했다가 인천경찰서의 조정으로 하루만에 철회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소금은 사람이 섭취해야 하는 필수적인 식품으로 그 제조는 예부터 국가의 주요 산업의 하나로 여겨 왔다. 조선조에는 관아의 감독 아래 각 지방에서 생산했는데, 생산된 소금은 이른바 소금 장수에 의해 벽촌에까지 배달됐다. 산골의 모든 통로는 이 소금 장수들에 의해 뚫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토록 귀중한 소금인데 이상하게도 훼방꾼 같은 사람을 지칭할 때면 소금 장수가 지나갔다고 하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주안이 191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그리고 남동과 소래가 192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금을 생산했다 이 세월 동안 인천에서 나는 굵은소금, 고운소금이 전 국민의 뇌리에 각인됐던 것이다. 이제 인천 소금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겠지만, 김장철이 다가오면 또 하나의 특산물 새우와 함께 그 흔했던 소금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