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사람들 하나둘씩 만석동 떠나
仁川愛/만석부두 관련 스크랲
2007-03-04 15:53:50
마을사람들 하나둘씩 만석동 떠나
선착장 연안부두로 옮겨져.. 마을화장실 신축 축하테이프 끊기도
여객선이 들어오던 만석부두 선착장(88년도 사진 왼쪽), 81년에찍은 만석동 43번지 모습. 오른쪽 위에 관제소 건물이 보인다.
만석동의 80년대는 동네모습의 변화가 가장 적은 시기였던 반면 사람들의 생활이 많이 변하고 동네에 빈집이 늘어나는 시기였다.
만석동은 80년대부터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해 70년대 말 한때 17,000여명이었던 주민수가 6,000여명이나 줄어 80년대 말에는 11,000여명이 된다.
동네에 사람들이 줄어들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1985년 괭이부리(현 만석부두)에 있던 영종도와 작약도를 왕래하는 선착장이 월미도와 연안부두로 옮겨갔다. 때문에 부두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만석동을 떠났다.
또 만석동에 정착한 피난민과 이농민들 중 더러 돈을 모은 사람들과 50년대나 60년대에 만석동에서 태어나 80년대 청년기를 맞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만석동을 떠났다.
80년대 이사간 사람들 많아
80년대 만석초등학교를 다녔던 박윤보(28세, 만석동56번지)씨는 "초등학교 1학년때는 12반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6반으로 줄었다"며 이때 이사를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청년들이 만석동을 떠난 이유에 대해 박씨는"가난이 싫었던 게 가장 큰 이유로 보입니다. 그 시절 우리 또래 아이들만 해도 20살만 되면 만석동을 떠나는 게 소원이었으니까요"하고 말한다.
이때는 사람들이 하던 일거리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부두노동이나 공장노동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 줄어들고 뱃일과 건설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주변 공장과 괭이부리에서의 일거리가 줄어든 반면, 70년대 말부터 일어난 중동붐과 88년 올림픽 경기호황을 타고 일어난 건설붐은 많은 사람들을 '건설노동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남자들은 뱃일이나 건설노동을 여자들은 굴까기나 유조선 청소 그리고 바다에 떠있는 기름막을 제거하는 작업등을 했다.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어른들의 일거리가 불안정해져 전보다 살기 힘들어졌던 이 때, 아이들은 이전보다도 어른들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기대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대부분 맞벌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빈집에 돌아와 가방을 던져 놓고는 밖에서 저녁때까지 놀곤 했다.
똥바다 주변과 지금 수정빌라 자리에 있던 빈 창고 그리고 화수부두 가는 길에 쌓여있던 모래더미 등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동네 형들과 아랫동네(6번지) 윗동네(9번지)로 나누어 패를 만들어 서로 싸우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놀거리도 마땅치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못사는 애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몰려다니던 게 재미있었던 이유인 것 같네요"
박씨는 그렇게 같이 자란 친구들이나 형들이 지금은 만석동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대개가 가난하기에 내세울 것이 없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같은 또래끼리 몰려다니며 같은 패가 아닌 아이들에게 주먹을 쓰기도 하고 다른 동네아이들과 싸우기도 했는데, 그렇게 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생각했다.
"나쁜 길로 빠진 형들이나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 소식을 들을 때 무척 안타깝지요"
박씨는 친구들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때 아이들을 다잡아줄 어른들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말한다.
동네모습은 바뀌지않아
80년대 만석동의 집들과 골목 모습은 이전 70년대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달라진 것이 있다면, 흙담집 벽에 시멘트가 덧발라지고 그 위에 페인트가 칠해졌다는 것과 공중화장실 일부가 수세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9번지 대우담길 옆의 화장실과 만석초등학교의 화장실도 이때 수세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화장실이 수세식이 아닐 때는 동네 오빠가 똥통에 빠진 일도 있었지요. 동네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뀌고 나니깐 사람들이 모두들 좋아했어요. 그래서 준공식 한다고 테이프를 끊고 야단법석을 떨었어요."
9번지에 사는 최순아(여 28세)씨는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뀐 것이 동네에 큰 행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또 초등학교 화장실이 양변기로 바뀐 일에 대해서도 "초등학교 2학년때 양변기로 바뀌었는데, 선생님이 아이들을 화장실에 데리고 다니며 양변기 사용법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어요"하고 말한다.
또한 대부분 아궁이에 나무를 때거나 더러 연탄을 때던 집들이 80년대 초부터 조금씩 연탄보일러로 바뀌게 되고 80년대 말에는 더러 기름보일러가 놓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네의 모습이 많이 바뀌기 시작한 때는 90년대에 들어서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동네의 집들이 조금씩 헐려 빌라가 들어서고 큰길이 나게 되면서부터이다.
80년대 이후 만석동은 사는 사람의 수가 더욱 줄어 90년대 말에는 2000가구 약 6400여명의 사람이 사는 동네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동네의 규모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동네에 지어지고 있는 만석주공아파트의 입주가 시작되는 올해 말이면 다시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임종연)
80년대 만석동 소사
-85년 12월, 43번지 만석1차아파트 완공 125세대 입주
-85년 만석부두에 있던 영종,작약도 정기여객선착장이 월미도, 연안부두로 이전
-87년 1월 만석2차아파트(18번지) 만석3차아파트(43번지)완공. 170세대 입주
-87년 기차길옆아가방 개원
-87년 7월 동구보건소 신축이전
-88년 2월 대건중학교 폐교
-89년 1월 만석동 청사가 만석동 46번지(우체국 옆)에서 현재 자리(만석동 18-4)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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