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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동이야기

가까운 고향, 너무 먼 통일

by 형과니 2023. 5. 2.

가까운 고향, 너무 먼 통일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7 15:26:02

 

가까운 고향, 너무 먼 통일

 

피난민 1세대가 50년 넘도록 가슴에 묻어온 고향 그리고 북에 둔 가족

 

 

북에 고향을 둔 피난민 들은 고향이 가깝다는 이유로만석동에 정착해

50년 넘게 살고 있다.

 

전쟁통에 고향을 버리고 살 곳을 찾아 만석동에 온 피난민 1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젠 칠순 팔순이 넘어 옛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린시절 고향만큼은 이름도 마을모습도 잊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 가족들과 굳게 약속했던 54년 전 젊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청년은 이제 통일되면 가리라는 한을 품은 노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만석동 피난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고향그리고 통일에 대한 추억과 생각은 무엇일까?

내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요. 고향에 아들삼형제 딸 하나 두었지요. 지금 다들 할아버지 할머니 되었을 텐데. 내 이산가족찾기 신청도 해보았는데 연락이 없어요.”

 

이웃집 골목하나하나가 생생한 고향

 

3대 독자였던 만석동 43번지 노현희(85)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무렵 부모님과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혼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인민군 부역을 피해 살 곳을 찾아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겨두고 내려 온지 54년이 지났다.

세월이 흘렀지만 할아버지에게 고향은 지금도 이웃집 그리고 마을 골목하나하나가 모두 생생한 곳이다.

여기서 배타고 장산곶 돌아서 6시간만 가면 바로 고향이오. 그리 멀지도 않아요. 그걸 휴전선 벽이 막혀 가질 못해요.”

 

할아버지는 남쪽에 내려와 다시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두었지만, 북쪽에 둔 가족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통일이 된다면 모를까 어느덧 쇠약한 노인이 되어 버린 할아버지는 이젠 통일을 바라기도 가족을 찾기도 늦었다고 생각한다.

 

통일. 이젠 통일소리 안 믿어요. 통일 될 것 같아요? 그놈(북한)들이 어떤 놈들인데요.”

할아버지가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전쟁이 가져다준 상처와 50년 넘게 남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어온 통일방안을 이젠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젠 통일이 된다 해도 그때까지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나이들면서 통일기대하기 힘들어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만석동 43번지에 사는 민만식(76) 할아버지도 나이가 들면서 통일의 기대를 가지기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60대 때는 통일이 될 거라 곧 휴전선이 뚫릴거라 그러고 믿고 살았지. 근데 이젠 그런 거 바라기도 힘들어. 북에 둔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가셨을 테고 누님 동생 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떻게 알겠어. 통일 되도 사람이 남아 있갔어. 그래도 그저 고향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네. 이젠 죽어서나 가볼라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던 해 큰형을 따라 단 둘이 남한으로 내려온 민 할아버지는 고향 가는 것이 소원이지만, 형제가 살아있을 거란 믿음이 하루하루 나이가 들며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혼자 가슴에 묻고 사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팔순이 넘은 큰형님이 얼마 전 몸이 아파 누우면서 고향에 사촌이 누구누구가 있고 친척들이 누가누가 있으니 너 살아 고향 가거든 잊지 말고 찾아보라 하더라구. 집 떠날 때 형들 따라 간다고 조르던 우리 막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야.”

 

민 할아버지는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이전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집 떠난 날 형에게 매달리던 15살 막내 동생을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피난민 1세대 노인들은 반세기 넘도록 마음 속에 품어온 북녘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뜻 모를 미안함이 깊어 갈수록 북한에 대한 불신과 원망의 깊이도 커져 가고 있다.

 

그리움이 커질수록 북에대한 원망도 커져

 

북한 놈들이 순순히 통일 할 것 같아요. 절대 안해요. 사람들 수태 죽었수다. 여 해안가 사는 사람은 산으로 옮기고 산골 사람들은 바닷가로 옮기고 우리 고향은 바닷가에 사람만 얼씬 거리면 쏴 죽였수다. 지긋지긋해요.”

 

노 할아버지에게 북한의 모습은 전쟁 때 고통 받고 힘든 모습으로 머릿속에 남아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만석동 9번지에 사는 양순옥(79) 할머니도 통일을 믿지 않는다.

 

고향에 한번 가보는 것이 평생소원이지만 반세기를 갈라온 원치 않는 이념의 벽과 전쟁의 상처가 깊기 때문이다.

 

내 죽기 전에 고향 한번 가는 게 소원이요. 지금 금강산 가네 개성에 가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요. 그저 고향 한번 가보는 것 만 못하지. 통일 안 되도 좋으니 고향 한번 가보았으면 좋겠소.”

 

황해도 옹진이 고향인 할머니는 가족들이 거의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전쟁통에 아이들과 연평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만석동에 들어와 산지 54년이 되었다.

 

우리가 평화로 산 줄 아시오. 아니올시다. 우린 전쟁으로 전쟁속에 살았소. 그 때 고통이 쉽게 잊혀지갔나. 고향도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양 할머니는 할머니세대에게 평화는 먼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젠 황혼에 들어 죽음을 준비하는 피난민 1세대 할머니 할아버지들. 마음속 고향과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할수록 50년 넘게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상처는 더 깊어지고 있다.

 

세월이 지나 어느덧 노인이 된 분들에게 통일 아니 고향땅에 한번 가보는 기대포기로 바뀌고 말았다.

 

고향이 가까워 통일되면 당장 달려갈 수 있을 거란 마음에 피난나와 자리 잡은 만석동.

 

피난민 1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 곳 타향에서 평생 바닷일 갯일로 노동하면서 전쟁의 아픈 상처를 서로 보듬고 잃어버린 평화를 그리며 만석동을 제2의 고향으로 일궈왔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 간직해온 북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힘든 노동으로도 덧없이 흘러버린 세월로도 잊게 만들 수 없었다.

 

50년 한결 같이 고향으로 달려갈 변함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산 피난민 1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 평생바람이 이루어지리란 소망도 가슴속에 묻어온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시간도 이젠 가지기 힘들어지고 있다. (:임종연/만석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