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만석동을 변화시켰나
仁川愛/만석부두 관련 스크랲
2007-03-07 15:28:54
누가 만석동을 변화시켰나
최근 10년간의 국가와 자본에 의한 변화는 만석동 공동체성 파괴시켜
만석동에 지어진 건물들의 모습은 만석동 60여년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다. 시멘트가 얇게 발라진 토담집사이 좁은 골목을 나오면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보이고 그 너머로 고층아파트가 또 그 맞은편 일제시대 지어진 오래된 공장이 보이는 동네. 지금 만석동이 가지는 풍경입니다.
해방후 반세기를 넘는 동안, 그 모습이 한국사회의 변화와 함께 시대에 따라 크고 작게 변해온 만석동은 동네모습 속에 그 60여년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 60여년간 한국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변해온 만석동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만석동의 변화' 그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연이은 노동자들의 분신, 카드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생계형자살, 늘어가는 노숙자, 사상최대의 청년실업률과 부익부빈익빈의 사회문제등은 요즘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서글픈 단면이다.
IMF,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 남겨
이러한 사회문제는 90년대초, 김영삼 정권의 출범과 함께 온 나라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바람 이후 더욱 심해졌다. 또 세계화 이후 발생한 97년 IMF 금융위기는 많은 국민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는 많은 상처를 남겼는데 만석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하루 소주 한병 팔기도 힘들어. 요즘은 동네에 사람도 없고 빈집만 늘고 예전엔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 같지 않았어. 동네 얼마 되지 않는 젊은 사람들 거의가 놀고 있으니..."
9번지 골목에서 가게를 하는 단옥선 할머니(80)는 요즘 만석동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80년대 경기호황에 힘입어 올림픽이 열리고 전국 여기저기 개발과 아파트공사가 한창이었던 때, 정부는 불량주택개량과 서민의 삶의 질 개선이란 명목으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전국적으로 시행한다. 만석동은 94년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되어 그 이듬해부터 판자집들이 헐리고 그 자리에 도로와 빌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삶의질 향상' 이유로 시작된 주거환경사업
"소방도로 때문에 집 헐리고 받은 보상비에 빚을 져 96년 빌라에 들어갔는데 그 이듬해부터 일을 나가지 못했어. 전기세 수도세도 못내는 형편에 집은 경매에 들어가고 다시 이 골목에 세를 얻어 왔지. 그래도 빌라 있을 때 보다 맘은 편해."
이 때 빌라에 입주했던 박광춘(65, 만석동9번지)할아버지의 말이다.
빌라에 입주했던 일부 주민들은 97년 IMF의 영향으로 일자리를 잃게되면서 무리하게 빌라에 입주하느라 진 빚에 시달리게 되고 일을 해도 돈을 모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만석동의 오래된 집들은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조금씩 헐리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절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도로와 고층아파트, 공장으로 둘러쌓인 섬같애. 여기도 이젠 어떻게든 변하지 않겠는가?"
김순남(71, 만석동9번지)할머니는 자꾸 변해가는 동네모습에 우려를 나타내며 이렇게 말했다.변화속에서 주민들 사이에는 개발의 기대와 동시에 삶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자리잡게 되었다.이러한 만석동과 주민의 삶의 변화는 최근 뿐 아니라 해방후 한국사회의 변화와 그 흐름을 같이하는데 각 시대별로 살펴보아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전 만석동은 1938년 중국본토 침략을 기점으로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의 병참기지였다. 일제는 만석동에 군함을 수리 할 수 있는 조선소 2곳(인천조선, 대일조선)과 잠수함을 건조하는 조선기계공작소(1937년)를 만들고 만석동주변에 재벌군수공장을 건설한다.
"왜정 때만해도 만석동은 원래 사람이 사는 동네라기 보다는 공장지대였어. 아침이면 길이 공장으로 일하러 오는 사람들로 꽉꽉 찼어."
해방전 만석동에 들어온 박상규(82, 만석동43번지)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만석동을 이렇게 말한다. 이 시기에 만석동은 조선시대 각지의 세곡을 쌓아두던 미곡창고와 성창포라 불리던 포구, 지금 수문통까지 연결되어 있던 수로가 있던 작은마을에서 공업지대로 탈바꿈하게 된다. 또 만석동에는 일제에 의해 노동자들이 대거 주변공장으로 유입된다.
피난민들에게 만석동은 '희망'을 주는 자리
해방 후 만석동은 6.25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의 거주지가 된다. 피난민들은 '이북의 고향과 가깝다'는 것과 '먹고 살 일거리가 있었다'는 이유로 만석동에 정착한다.
전쟁이 끝나고 난후, 주로 미국에서 들어오는 원조물자가 괭이부리(만석부두)를 통해 들어오게 되면서 피난민들은 만석동에서 등짐을 지는 부두노동으로 생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만석동이 바다와 가까운 이유로 갯일도 가능했다.
이 시기에 피난민들은 만석동의 낮은 야산과 철로변 그리고 수로변에 루핑을 지붕으로 얹고 땅을 파 나무를 얼기설기 대고 흙을 발라 벽을 세운 '땅막'을 짓고 살았다.
형편이 모두 어려웠던 피난민들에게 만석동은 '희망'을 주는 자리였으며 서로의 처지를 돌보고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1960년대 들어 박정희 군사정권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통해 중공업 중심의 수출지향 공업화 정책을 추진한다. 박정희 정권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곡가 저임금정책'을 펴게 되는데,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이 점차 폐허가 되어 가는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올라오게 된다.
이 때 만석동에도 이농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는데, 주로 소규모 자작농이나 소작농을 하던 호남지역 농민들이 대거 들어오게 된다.
만석동 주변 대성목재, 동일방직, 삼미사등의 공장노동자로 일하던 이농민들은 만석동에서 서로 의지하며 힘든 노동을 버티고 일거리와 인심을 피난민들과 나누며 살았다.
80년대 들어 만석동은 60∼70년대와는 달리 많은 주민이 동네를 떠나게된다.만석동에 정착한 피난민과 이농민들 중 더러 돈을 모은 사람들과 50년대나 60년대에 만석동에서 태어나 80년대 청년기를 맞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만석동을 떠났다. 만석동은 80년대 이후 더욱 가난한 사람들이 오래된 집들과 골목을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주거환경개선이 완료된 지금, 만석동에는 1970년대 17,000명이었던 주민수의 절반인 약 8,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또 오래된 집들에는 대부분 노인들만이 남게 되었다.
만석동은 일제시대 식민지 노동자들의 일터로, 6.25전쟁 이후엔 분단으로 생긴 피난민들과 60∼70년대엔 농촌을 버리고 올라온 이농민들의 보금자리로, 90년대에는 IMF이후 삶의 궁지에 내몰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되어왔다.
"만석동하면 인심 하나는 끝내주는 동네에요"라는 이영래(64, 만석동 43번지)씨의 말처럼 만석동은 가난한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나누며 공동체성을 유지하던 동네였다.
해방 후 가난한 피난민과 이농민의 손으로 동네의 모습을 꾸리고 공동체성을 키워온 이전의 변화와는 달리 최근 10여년간 국가와 자본(돈)의 힘에의해 이루어진 변화는 동네의 모습과 공동체성을 파괴해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의 변화와 함께 변해온 만석동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예측하는데 있어서도, 만석동의 역사가 지닌 공동체적 가치가 철거해야 할 가치인지 간직하고 이어 가야 할 가치인지를 가늠해보는데도 의미가 있다. (글:임종연/만석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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