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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동이야기

"죽는 거, 그리 두렵지 않아.."

by 형과니 2023. 5. 3.

"죽는 거, 그리 두렵지 않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7 15:31:40

 

"죽는 거, 그리 두렵지 않아.."

 

팔십년을 넘게 산 우리동네 세 할머니가 들려주는 인생이야기

 

"세상엔 악한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더 많아."

 

 

최인숙 할머니

 

"식구 중에서 누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는 게 제일 싫지. 그런 말을 들으면 겁이 나."

올해 나이가 84세인 최인숙할머니는 자신이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죽는 복을 타고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할머니는 아직까지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지만 나중에 대소변 못 가리고 오래 아프다가 죽을까 봐 제일 걱정이다. 하지만 최씨 할머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남편과 아들이 먼저 갔지만 생각해 보면 별 느낌은 없어. 죽은 사람 잊는데는 세월이 약이지.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죽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할머니의 집은 혁진산업 옆의 작은 담뱃가게다. 37살에 시작한 가게는 주위에 집들이 많았을 때는 다른 물건들도 파는 가게였다. 하지만 새로 길이 뚫리고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나서는 담배만 팔고 있다. 이웃들이 많이 이사가고 난 요즘에 할머니는 예전보다 외로움을 많이 느끼신다.

 

"피난 내려와 살면서 정들었던 사람들이 많이 떠났어. 가끔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쉬었다 가라고 붙들곤 해."

최인숙할머니는 죽기 전에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 가보는 것이 소망이다. 피난 내려와 서울로 생선장사를 하려 다닐 때도 할머니는 논에 벼를 보면 고향 생각이 나서 많이 울곤 했다. 지금도 고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할머니는 금강산에라도 가서 고향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다고 한다.

 

80평생을 살아오면서, 일제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할머니는 얻은 게 많다. 사람은 정정당당하게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세상에는 악한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밖에 나와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아도 선한 사람이 더 많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선하게 봐 주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지."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게 편해지겠지."

 

 

박순기할머니

 

"나 죽는 건 상관없지만 애기 때문에 걱정이야. 나 죽으면 누가 키워줄려는지."

 

박순기할머니(82)는 증손녀 채연이(7)와 만석동 2번지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는 손자며느리가 집을 나간 5년전부터 증손녀를 키우고 있다. 같이 살던 손자도 집을 나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증손녀와 생활하면서 할머니의 생활도 많이 바뀌었다. 전에는 경로당에서 야유회도 많이 따라다니고 했는데 지금은 증손녀 때문에 밖에 나가질 못한다.

 

요즘에는 채연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경로당에 나가서 100원짜리 화투를 치거나 마실 다니면서 하루를 보내.”

 

박씨 할머니는 요즘도 고향인 전라도에 살고 있는 조카들이 내려와서 같이 살자고 하지만, 채연이를 키울 생각에 안 내려가고 있다.

 

오래 살아온 만큼 할머니에게는 여러 가지 잊지 못할 기억들이 많다. 할머니는 일제시대에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을 했다. 해방이 되었을 때는 일본군이 도망간 관청에서 쌀을 나눠준다고 해서 쌀을 받으러 갔던 기억도 있다. 할머니가 겪었던 일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전쟁 때 피난 갔던 일이다.

 

"둘째를 임신한 배를 안고 5살 먹은 큰딸을 데리고 피난 다녔어. 전라도에서는 피난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피해 다녔지."

 

2월에 박씨 할머니 이웃에 살고 있던 최선옥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최씨 할머니는 자식이 없어 동네 사람들이 함께 초상을 치루었다. 최씨 할머니의 죽음을 보면서 박순기 할머니는 잘 죽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먹고 자식도 없이 몸도 많이 아팠는데 이제 죽어서 편안해졌을 거야. 나도 죽을 나이가 지났는데 아직 안 죽어지네. 나도 죽으면 모든게 편해지겠지."

 

 

"나는 나이가 많아서 부끄러워."

 

 

조정옥할머니

 

"나는 나이가 많아서 부끄러워. 친구들도 모두 죽고 나만 살아 있어. 너무 오래 산 것 같아."

웃으며 자신의 나이가 82살이라고 말하는 조정옥할머니(만석동 9번지)10년전까지 스텐공장에서 일했다. 41살때 남편이 죽은 뒤 자식들과 생활하기 위해 대우중공업에 들어갔다. 대우중공업을 그만둔 뒤에도 신발공장, 스텐공장 등에서 일을 하다가 눈이 나빠지면서 일을 그만 두었다.

 

"공장 일은 힘들지 않았어, 다마 숫자를 세거나, 스텐 시야시 작업을 했지. 그렇게 일을 다니며 아이들과 생활하고 결혼까지 시켰어."

 

할머니는 19살 때인 1939년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기 전까지 집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당시에는 길에서도 일본군들이 무조건 끌고 가곤 해서 집안 식구들이 못나가게 했다.

 

고향이 개성인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피난 내려 왔다. 남편도 친구들과 함께 먼저 피난을 갔지만 전쟁통에 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사까지 치르고 내려와야만 했다. 아이들과 피난 내려 온 할머니는 강화에서 남편을 만나 휴전이 되면서 만석동으로 왔다.

 

"시어머니는 한사코 집을 지켜야 된다며 나오질 않았어. 작은아이는 업고 큰아이 손을 잡고 혼자서 남편과 약속했던 강화로 들어갔지."

 

할머니의 하루는 새벽 2시에 시작된다. 일찍 일어나는 만큼 오후 4시에 잠자리에 든다. 지난 겨울엔 넘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았다. 할머니는 저녁만 되면 수술 받은 다리가 아파와 약을 먹고 잠을 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조정옥할머니는 얼마전 태어난 증손자를 보고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진짜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자식들에게 폐 안 주고 조용히 갔으면 좋겠어."

 

(:강길재/만석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