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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개항기 인천 발행 일어신문 해제본 공개

by 형과니 2023. 5. 4.

개항기 인천 발행 일어신문 해제본 공개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8-06-07 01:32:22


개항기 인천 발행 일어신문 해제본 공개

화도진도서관(관장·김희수)이 최근 개항기 인천에서 발행된 일어신문의 해제본을 공개했다. 지난해 말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신문과 조선신보의 마이크로필름(62롤·1906년 9월~1921년 3월)을 입수한 화도진도서관은 이를 디지털화하는 한편 영인본(34권)을 제작했다.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명예교수가 해제를 맡았다.

화도진도서관 박현주 과장은 “아직 일반 시민들이 자료를 활용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라며 “인천학 연구기관과 연구자들에게 공개하는 한편, 앞으로 인천학연구원 등과 함께 일반 공개를 위한 작업을 더 진행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인천격주상보

해제 작업을 한 정진석 교수는 “인천은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기에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도시다”라며 “서울보다 먼저 신문을 발행해 한 때는 몇 개 신문이 자리 잡고 했다”고 밝혔다.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최초로 신문을 발행한 곳은 부산. 일본 거류민들이 재부산상법회의소가 1881년 12월10일부터 ‘조선신보’라는 순간(旬刊·열흘마다 발행) 신문을 창간했다. 이는 조선정부가 발행한 최초 신문인 ‘한성순보’보다 1년2개월 앞선다.

인천에서는 1890년 1월28일 일본인(제물상보)들이 ‘인천격주상보’라는 신문을 발간한 것이 처음. 정 교수는 “인천은 일본과 서양의 문물이 조선에 유입되는 첫 관문이면서 한말부터 일제기간의 신문발달사에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지역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선순보

‘인천격주상보’의 발행인은 사노 세이지로 월 2회, 격주발행하며 경인지역의 상업 관련 소식을 전했다. 초기 신문이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후에 이름을 바꾸면서 발간된 ‘조선신보’와 체재가 비슷했을 것으로 정 교수는 파악하고 있다.

‘인천격주상보’는 1891년 8월15일 제44호까지 발행된 후 9월1일부터 ‘조선순보’(朝鮮旬報)로 이름을 바꾼다. 열흘에 1번, 월 3회 발행됐다. 상보 발생 당시 인천에 살고 있는 일본인 거주자는 1천361명, 무역액은 229만 엔 내외였지만 순보로 제호를 바꿨을 당시에는 2천446명, 450만 엔으로 부쩍 늘었다. 정 교수는 “인천은 일본인 거주자도 늘어나는 추세였고, 일본에서 조선에 수출하는 상품의 광고도 다양했다”라며 “일인들의 신문 발행에 인천은 적절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고 밝혔다.

▲조선신보

1892년 4월5일까지 22호를 발행한 후 열흘 뒤인 4월15일부터 제호를 ‘조선신보’(朝鮮新報)로 바꾼다. 상보와 순보의 지령을 이어 67호부터 발간한 조선신보는 1892년 7월 제71호부터 주간(토요일 발행)으로 앞당겼다. 역시 인천의 무역량이 늘어나고 거류민도 많아졌다. 청일전쟁 등으로 휴간했다가 1895년 10월25일 아오야마 요시에가 격일 발행으로 복간했다.

정 교수는 “일어 전용 신문인 조선신보에는 당시 한국인이 발행하던 신문과 비교하면 광고가 훨씬 많았다”고 밝혔다.

1890년대 이 신문에는 일본의 은행광고를 비롯해, 아사히 비루(맥주), 포도주, 일본의 청주같은 광고가 실렸다. 상세한 물가시세도 중요한 뉴스로 편집됐다. 때론 신문의 1면 머리에 광고를 싣기도 했고, 면 전체에 광고를 게재하는 때도 있었다.

정 교수는 “다양한 광고를 통해 일본과 서양에서 어떤 상품이 인천을 통해 들어오는 알 수 있는 박물관과 같다”며 “서울의 한성신보는 정치적인 기사를 다루는 종합지였지만 조선신보는 상업목적의 경제지 성격이었다”고 설명했다.

1908년 4월18일부터 연중무휴 발행되던 조선신보는 그러나 신문사 안팎의 여러 가지 문제로 같은 해 11월20일 지령 3009호를 끝으로 19년 역사를 마감한다.

▲조선신문

조선신보는 5일 후인 12월1일 ‘조선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1호부터 다시 시작한다. 사장은 하기야 카즈오, 경성에 지사를 갖고 있는 인천지역 유력 신문으로 자리를 확고히 했다. 서울의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1906년 9월1일 창간)와 쌍벽을 이뤘다고 정 교수는 밝혔다. 1912~1913년 무렵에는 국한문 신문도 부록으로 발행했다고 하지만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에 따라 데라우치 총독은 신문통일정책을 펼쳤지만 조선신문은 폐간 조치에 불응했다.

정 교수는 “1906년 경성일보를 창간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신문을 매수하려했고, 한일병합 후 데라우치도 통합을 강요했지만 조선신문은 통합에 반대했다”며 “조선신문은 한일병합 후인 1912년 신년호를 92쪽 특집으로 만들 정도로 경영이 안정됐다”고 밝혔다.

▲본사 이전

1919년 12월18일 조선신문은 인천을 떠나 서울로 본사를 옮긴다. 마키야마 코우조우가 신문사를 매수했다.

본사 이전은 인천의 입지와 맥을 같이 한다. 정 교수는 “창간 무렵 인천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상업적 전진기지로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일본인 거류민도 서울보다 많았다. 그러나 1919년 말에는 서울이 식민통치의 확고한 중심이 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인천이 신문사 입지조건상 불리한 상황에 빠진 것. 신문의 성격도 ‘상업’에서 정치, 경제, 사회를 모두 아우르는 종합지가 돼 있었기 때문에 서울 이전은 불가피했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정 교수는 “조선신문은 일제 강점기 발행된 신문 가운데 52년이라는 가장 긴 연륜을 쌓았다”며 “비교적 많은 지면이 보조돼 있어 인천사 연구는 물론, 이 기간 역사와 일제의 침략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