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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어재연장군-수자기*거대한 깃발 아래 조선군 용맹이 깃들다

by 형과니 2023. 5. 5.

어재연장군-수자기*거대한 깃발 아래 조선군 용맹이 깃들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11 20:12:54

 

지금으로부터 꼭 137년 전, 1871611. 강화도 광성보에서는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미 해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훗날 우리 역사에 기록된 신미양요다. 조선군은 낡은 전근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미 해군은 신식 대포와 기관총, 연발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과 휘하 조선 병사 350여명은 장렬하게 전사한다. 전투가 끝난 후 피 냄새가 진동하고 포연이 자욱한 광성보에는 장수의 상징이었던 ''자기(帥字旗)가 미 해군에 의해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려진다. 미 해군에게 약탈돼 미국으로 건너간 수자기는 이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수장고 속에 묻히고 만다. 조선군의 용맹과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깃든 수자기가 137년만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 어재연 장군 수자기 귀환기념 특별전

 

인천시립박물관은 11일부터 76일까지 시립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귀환을 기념한 특별전 '하늘을 울린 전투-신미양요'전을 연다.

 

전시에는 137년만에 인천으로 돌아온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와 신미양요 전후 시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과 이에 대한 조선의 응전의 기록을 담고 있는 미국 잡지 기사 사본, 어재연 장군 사후 국왕이 품위를 올려준 교지, 어재연 장군의 글 모음집 충장공유서, 국왕이 어재연에게 하사했던 사명기, 쌍충비 탁본 등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와 관련된 유물이 전시된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던 자동식 활인 수뇌와 조총도 전시된다.

 

신미양요 당시 인천 연안에 정박한 미 함대의 정황을 기록하고 인천도호부의 방비실태와 미군의 상륙을 대비한 작전계획이 언급돼 있는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 필경 사본도 전시되고 있다. 이 유물은 당시 인천부사였던 구완식의 조카 구연상이 48일간(음력 46523)의 일기이다. 1963년 인천시립박물관장이었던 검여 유희강이 원본 소장자 이용희씨로부터 대여받아 필경한 것으로 현재는 원본의 소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조선 수군의 작전도를 그린 해진도도 전시된다. 이 유물은 인천시립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해군박물관 3곳에서만 볼 수 있다.

 

# 수자기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는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136년간 잠들어 있다가 지난해 101910년간 장기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원래 수자기가 게양됐던 인천으로 137년만에 귀환이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는 가로 4.15m 세로 4.3m 크기로 삼베로 짜여진 천 위에 검정색 한자로 수자가 쓰여진 깃발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수자기이기도 하다.

 

미군의 기록을 보면 당시 포대에 꽂혀 있던 수자기를 조선군 포수 네댓 명이 깃대에 몸을 묶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137년만에 되돌아온 수자기는 깃발 오른쪽 아래가 훼손돼 천을 덧대었다. 수자기가 훼손된 것은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 병사들이 미군의 관례에 따라 깃발을 전리품으로 찢어 가졌다는 설과 미군에 의해 강제로 내려질 때 찢어졌다는 두 가지 설로 설명되고 있다. 훼손 이유야 어떻든 우리에겐 치욕스런 역사다.

 

수자기는 조선시대 군영의 지휘관을 상징하는 깃발로 평상시에는 군사를 조련할 때에만 걸었고, 전시에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게양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크기가 매우 거대하여 한 번에 올리기가 어렵고 북을 치면 올리고 징을 치면 멈추는 방법으로 모두 세 번에 걸쳐서 올렸다고 한다.

 

# 치열했던 광성보 전투

 

병인양요 발발 전인 1866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안도 앞바다에 나타났고, 그들을 감시하던 순영의 중군 이현익이 납치당해 셔먼호에 감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평양군민들은 셔먼호를 격침시켰다. 셔먼호가 침몰당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미국은 1871년 사령관 로저스가 지휘 아래 콜로라도 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 대포 85, 병력 1230여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한다.

 

미 함대는 610일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을 공격 점령하고 611일 광성보로 진격해왔다. 어재연과 민간인 신분으로 종군하고 있던 어재연의 동생 어재순, 조선병사 1천여명은 광성보에서 미 해군에 맞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미군의 함포사격과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맞섰다. 실탄이 떨어지자 소총을 휘두르고 돌맹이를 던지는 등 맨손으로 미군에 저항했다. 어재연 장군도 장검을 뽑아들고 미군과 맞서 싸웠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어재연과 어재순 형제를 포함하여 광성보를 지키던 조선군 350여명 전사했으며 살아남은 일부 군사들은 손돌목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3, 부상자 10여명뿐이었다.

 

어재연 장군은 "나는 국명을 받들고 이곳 광성을 지키고 적군을 물리칠 의무를 지고 있으니 천우신조로 광성을 지켜 적을 물리치면 영광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생명을 걸고 역전 분투하다가 나라에 목숨을 바치고 말가죽에 나의 시신이 쌓여져서 돌아가면 그뿐이니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치열했던 전투는 참전 미군에 의해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조선군은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슐레이 대령)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00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염하에 투신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앨버트 가스텔)

 

# 화해와 용서

 

어재연 장군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424일이면 선조들을 추모하는 광성제를 지낸다. 지난 2000년 광성제에는 당시 미군측 전사자 맥키 중위의 후손 제임스 워드롭이 참가했다.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어재연의 후손 어윤원을 만나 "후손으로서 당시의 일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선조들은 적으로 만났지만 후손에 의해 비로소 130년만에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혁신기자 blog.itimes.co.kr/mr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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