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 쌍충비각 앞에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11 20:31:21
광성보 쌍충비각 앞에서
나채훈 역사소설가
“이 나라는 참 아름답소. 푸른 산과 푸른 계곡이 굽이지고 온갖 곡식이 풍요롭게 자라고 있소. 작은 초가집들이 상록수 숲 속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어 당신을 불러다가 그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금할 수 없구려.”
이것은 지금부터 137년 전 신미년 5월 16일 조선원정길에 올라, 6월1일 강화해협에서 탐측활동을 하던 미국 동아시아 함대의 딜톤 대위가 아내에게 보낸 첫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6월 11일 미군은 8인치포와 모노캐시호의 함포사격, 휴대한 박격포로 광성보를 공격하며 쳐들어 옵니다. 이때 진무중군 어재연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비군 600명이 광성보 일대에 숨어있다가 미군에 맞서 목숨을 다해 싸웁니다.
미군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항복같은 걸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00 여명은 강물에 투신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날 2시간 45분의 전투에서 조선군 243명이 전사했고 자결순절한 병사까지 합치면 350명이 죽었습니다.
어재연 장군 역시 이 전투에서 순절했습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장수로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광성보에서 진을 치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비록 외적을 물리치지는 못했으나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전투를 했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지요.
전사자 가운데 어재순도 있었습니다. 어재연의 친동생입니다. 그는 형과 달리 선비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외침 소식을 듣자 자원하여 광성보로 달려옵니다. 만류하는 가족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라를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친다는 각오로 찾아온 것이지요. 형은 동생을 보자 꾸짖으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동생만큼은 살리고 싶었던 형의 심정…. 그러나 동생은 돌아가지 않고 미군을 맞아 싸우다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맙니다.
어재연과 어재순, 이들 형제의 순절을 기린 쌍충비각이 순절 병사를 묻은 신미순의총과 함께 있습니다. 지금 필자는 그 앞에 서서 목에 칼을 대고 피를 뿜는 자결 병사들과 13겹 방탄복에 불이 붙어 타오르던 조선 병사들의 살냄새를 130여년 시공을 뚫고 투시해보고 있습니다. 등살이 꿈틀거립니다. 그들과 내 속에 흐르는 피의 원형질에 동질의 분자가 섞여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날따라 소풍온 학생들이 떼를 지어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행렬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까지 신미년의 악몽을 떠올릴 필요야 없겠지만 미래의 동량을 길러내려면 알아두어야 할 약체 역사의 현장에 너무 무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더군요.
21세기의 훌륭한 지도자는 ‘대항(against)’에서 ‘위하여(for)’로 나아갈 수 있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19세기 이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봉건주의, 식민주의, 공산주의, 빈곤과 같은 적(敵)들에 ‘대항’해 왔지만 이제는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소명의식, 시대의 흐름을 읽는 역사의식, 균형감각과 판단력, 책임과 신념의 윤리, 설득력, 도덕성, 공정함 등등의 덕목이 미래의 동량들에게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쌍충비각과 신미순의총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는 한국판 팡테옹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팡테옹,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묘지쯤 되겠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현격하게 다르지요. 이곳에는 프랑스를 빛낸 불세출의 위인들만 묻힐 수 있습니다. 생전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금세 이곳을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사후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인물들이 수두룩합니다. 한마디로 프랑스 역사의 정화(精華)요, 국민적 자긍심의 결정체와 같습니다.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이곳에서 그의 취임식을 가진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쌍충비각 앞을 재잘거리며 무심히 지나는 우리 청소년들과 광우병 파동에 촛불을 들고 나선 청소년들 모습이 눈앞에 순간적으로 오버랩되면서 잘되는 나라가 그저 잘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한동안 맴돌았습니다.
초가집에 살고 싶다던 딜톤 대위는 그 다음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날씨는 변덕스럽고…정말 이젠 이곳이 싫어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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