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이야기

근대건축문화의 보고寶庫, 인천仁川

by 형과니 2023. 5. 6.

근대건축문화의 보고寶庫, 인천仁川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13 05:00:13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인천편)

근대건축문화의 보고寶庫, 인천仁川

 

 

인천은 비류 백제의 도읍지인 미추홀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외세가 밀물을 이루는 18세기 말에 이르면 제물포라 불리던 항구도시 인천은 개화의 선구도시로 자리매김한다. 그렇기에 인천에는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근대문화재가 많다.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으로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을 하게 되고 이는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점이자 15세기 일본 나가사키와 같은 서양문물의 실험도시가 된 것이다.

 

내동 성공회 성당과 답동성당

 

인천 자유공원은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내년쯤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예정이다. 정상의 맥아더 동상은 현재 보수 중인데 현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을 상징하듯 경찰들이 동상주변을 지키고 있다. 월미도와 여러 부두가 한눈에 보이는 자유공원은 4월이면 흐드러진 벚꽃의 절경을 즐길 수 있다. 개항기,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바다에 이르는 지역은 서구열강의 조계로 나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부근을 지난다면 마치 고전영화 세트장을 걷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은 홍예문 근처에 있는 내동 성공회 성당(인천유형문화재 제51)을 찾았다.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아담한 크기의 중세풍 석조건물이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이며 천주교에서 갈라진 기독교의 한 유파다. 영국 성공회는 1890년 영국해군의 종군신부 고요한 주교 등 선교사 6명이 인천항에 첫 발을 내딛으며 전파되었다. 같은 해 929일 성당을 건축한 후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2년에는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1904년에는 성공회 신학원으로 1956년까지 운영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훼손된 부분을 수리하여 약 2년간 황해중학교로 이용되다가 헐어내고, 1956623일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성당을 건축하였다. 중건 당시 건물의 기초를 ‘H으로 사용했다. 지붕은 돔 형식이 아닌 목조 트러스트이고 전면과 후면은 화강암이다. 외벽은 빨간 벽돌을 쌓았는데 십자형의 채광창이 이채롭다.

 

이어서 답동성당으로 향하다 들른 곳은 내동에 있는 유항렬의 집’. 허름한 골목 한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개인주택이다. 실내를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외벽에 담쟁이가 세월의 장식을 더해 더욱 고색창연해 보였다. 이 건물은 1937년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 자격증을 취득한 유항렬이 지은 주택이다. 지상 2, 지하 1층으로 현관에는 원주를 세우고 베란다를 설치하였다. 일부 노후된 흔적이 있지만 대체로 양호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답동성당(사적 제287)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아직도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 본당으로 설립 당시의 이름은 '제물포 본당'이었는데, 그 후 '인천 본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 24(1887) 한불조약이 비준된 이후 1889년 파리의 외방 선교회 소속 요셉(빌렙) 신부가 인천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이래 곧 신학교로 전임해 성당건축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 3대 서요셉 신부에 의해 답동 언덕 위에 189611400평 규모의 성당이 세워졌다. 1937, 늘어나는 신자들을 위해 확장공사를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성당의 건평은 396,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三廊式이고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세부의 형체를 구분 짓는 라인은 하얀 화강석으로 마감하여 아름다움을 더했다. 정면 중앙과 좌우에 반원 아치로 된 출입구가 나 있고 상부에는 반원 아치의 창을 두었다. , 정면 중앙은 원화창圓花窓(Rose Windows)이며 석재의 띠 돌림으로 장식하고 건물 상부의 세 꼭짓점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추고 그 위에 돔을 얹은 형태이다. 서울 명동 성당, 전주 전동 성당과 함께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실내로 들어서자 돔 형태의 천정과 대리석 기둥이 길게 늘어선 주랑이 경건함을 더한다. 양 벽과 강론대의 배경으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오색의 빛깔을 연출하고 있었다.

 

관청건물과 금융가

이제 발걸음을 중구 항동으로 옮긴다. 멀리서 보아도 웅대한 규모의 근대식 행정관청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인천우체국(인천유형문화재 제8)이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우편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지은 근대식 건물로서 건립 당시의 명칭은 인천우편국이었으며, 19498월에 인천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건립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건축양식을 단순화한 건물로서, 총 면적은 540평이다. 입구 양쪽에 큰 기둥 형식의 탑부塔部를 세우고, 그 사이에 주두柱頭가 없는 여러 개의 기둥을 받쳤다. 전체적 구조는 벽돌조이지만, 바닥은 콘크리트로 시공하였다. 외부는 하단을 화강석으로 2단을 쌓고 그 윗부분은 시멘트 몰타르로서 석조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6·25전쟁 때 일부가 파손되어 슬래브 지붕을 슬레이트로 보수하는 등 1957년 복구공사를 마쳤다.

 

발길을 중구 중앙동 쪽으로 옮긴다. 현재 인천 중구청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 인천부청사였다. 188310월 양식 2층 목조건물로 시작해 1902년 청사를 신축하고 1906년에는 인천 이사청으로, 그리고 1910년에 조선 총독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인천부청으로 사용했다. 1933년 기존의 건물을 헐고 현재의 모습으로 신청사를 축조하였다. 중구청 아래 길로 가다 보면 근대인천의 금융가를 지나게 된다.

 

맨 먼저 구 일본 58은행’(인천유형문화재 제19)이 눈에 띈다.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인천지점이었다. 해방 이후 조흥은행이 들어서기도 했고 대한적십자에서 사용하기도 했으며 한때는 청년회의소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건물은 일본에서 들여온 벽돌로 축조한 2층으로 벽돌 위에 몰타르를 발라 마감하였으며, 중요 부분은 석재로 마감하였다. 프랑스풍의 건축물로 건물로의 진입은 대지의 측면에 출입구를 두었으며 지상에서 1m 정도 올려서 출입구를 두어 5단 정도의 계단을 오르도록 했다. 1층에는 홀과 화장실이 있으며, 2층으로 오르는 폭 1.1m 계단은 45도의 가파른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2층에는 발코니를 두었으며 맨사드 양식의 지붕에는 도머창이라 부르는 지붕창을 두어 실내공간의 채광을 배려하였다. 현재는 인천시 중구 요식업조합이 매입하여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몇 발자국 조금 더 걸으면 구 일본18은행’(인천유형문화재 제50)이 나타난다. 오색기가 펄럭이고 있어 다가가 보니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이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18은행 인천지점은 189010월에 설치되었으며, 광목과 같은 직물중개무역에 관련된 금융업무를 위해 개설되었다. 1954년에는 신탁은행과 상공은행이 합병한 한국흥업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가 이후 1992년까지 카페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중고가구도매상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출입구 장식은 아주 정교하게 처리하여 장식성을 배려하였다. 지붕은 목조 트러스 위에 일식기와로 마감한 모임지붕이다. 실내로 들어서니 인천 근대 건축의 역사를 알기 쉽게 작은 모형, 기록 필름, 엽서사진 등으로 꼼꼼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벽돌 벽을 보호하기 위해 투명 아크릴을 세웠고 2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 역시 그대로였다.

 

‘18은행바로 옆으로 일본제일은행지점’(인천유형문화재 제7) 건물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일본제일은행지점은 처음에 금괴와 사금을 사들일 목적으로 부산지점 출장소로 출발했다. 이것이 인천지역 근대 은행업무의 효시이다. 1889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1909년에 한국은행이 창립되어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통합되었다가 1911,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바뀌면서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되었다. 1899년에 64평의 석조 단층 건물로 세워진 이 건물은 일본인 니이노이에 다카마사가 설계했으며,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벽돌, 석재, 시멘트, 목재 등 일체의 자재를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직접 가져와 건축하였다. 현관은 상부에 반원형의 아치를 틀어 건물 중앙에 배치하였으며 그 위에는 르네상스풍의 돔을 오려 좌우대칭의 입면으로 처리했다. 외부마감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지붕 꼭대기부분에는 바로크풍의 장식창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없다. 중앙 돔의 양옆에 있는 작은 탑은 나중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처마부분에는 둥근 구멍을 둔 패러핏 난간을 설치하였다. 전체적으로 후기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단순화한 형식을 띠고 있다. 20008월 보수공사 후 중구청 관광개발과에서 사용하다가 현재는 비어 있는 상태이다.

 

자장면의 발상지, 공화춘共和春 (등록문화재 제246)

 

일본 조계지였던 중앙동을 벗어나 오르막을 오르면 청관지역이 나타난다. 현재 차이나타운으로 새롭게 단장한 선린동과 북성동 지역은 지금도 근대 중국식 건축물이 즐비하다. 특히 자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공화춘은 올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자장면의 정확한 근거자료는 거의 없다.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화교들은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됐고 이렇게 해서 볶은 춘장(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서 먹는 자장면을 만들어 팔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은 1905년 개업한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청요리로 이름을 크게 날렸던 곳이다. 공화춘은 1930년을 전후하여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형태가 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 청나라 조계지의 건축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면은 타일을 사용했고 평인방을 사용한 사각형 창이 나있다. 경사 지붕을 가리기 위하여 외벽 상부에 파라펫을 설치하였다.

 

미래를 위한 근대문화유산 바라보기

 

이외에도 언급하지 못한 인천의 근대문화재는 많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는 한국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이었던 제물포 구락부’, 그리고 19036월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 팔미도 등대’(인천유형문화재 제4), 선린동 부두 근처에 있다가 지금은 인하공전 캠퍼스 안으로 옮겨진 대한민국 수준 원점’(평균 해수면의 기준, 등록문화재 제247) 등이 그것이다.

 

근대문화유산은 그 대부분이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관계되어 있기에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함께 청산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굴절된 역사, 아픔의 역사라도 그것은 엄연히 우리의 역사이다. 오히려 근대문화재를 보존하여 과거를 둘러보고 다시는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인천의 근대문화유산은 앞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할 것이다

출처 :손끝으로 전하는 공예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알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