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도(沁都)와 용흥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8-06-24 12:53:18
심도와 용흥
‘강화비단’이 강화도의 대명사이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 강화특산이라면 인삼을 꼽았지만 예전에는 화문석과 비단이었다. 그만큼 강화군은 직조가 성했던 곳이다. ‘강화군민의 노래’에도 길쌈하는 아낙의 구절이 들어있다. 즉 4절에 “소 모는 저 색씨는 길쌈엔 명수라서 짜내는 강화비단 천이요 만필인데”라고 노래한다.
강화비단은 이미 사백수십년전부터 강화도를 빛냈다. 전국을 누비는 등짐장수들의 비단은 대개가 강화산이었다. 이것이 80년대초 화학섬유와 인력의 도시진출로 사양화하기까지 강화군의 경제 주축이 되었다. 그때 강화읍내 곳곳의 골목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활발하게 돌아갔다. 밤늦도록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어쩌다 강화도를 찾는 길손들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당시 직물공장은 심도견직 이화견직 조양방직 경도직물 남화견직 등이었다. 그 중에도 심도직물이 상징적이었다. 국회의원이던 김재소씨가 경영, 견직기 210대에 1천200여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었다. 사장 스스로 제품을 지고 전국을 누볐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되었으며 외국에도 수출했다. 심도(沁都)는 강화도의 옛 이름이었다.
지난 20일 그 심도직물 터에 용흥궁 공원이 개장되었다고 한다. 강화도를 찾는 관광객의 편의 제공을 위해서인데 1만3천400㎡에 공원녹지 주차장 등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소재지 관청리는 강화읍의 중심가로 건물이 조밀, 그동안 찾아드는 외래객들에게 주차할 곳이 없어 큰 불편을 끼쳤었다.
공원의 이름이 된 용흥궁은 조선조 25대왕 철종의 잠저로 현재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잠저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집을 말하는데, ‘강화도령’이던 철종이 등극하자 그가 살았던 초가 터를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다시 짓고 이름한 곳이다. 그러나 그마저 오랜 세월 몹시 헐었었는데 80년대초 대대적으로 보수,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세의 노총각 나무꾼이 하루아침에 임금이 되어 시위를 받으며 상경길에 오르는 장면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심도와 용흥의 합작 공원은 강화도의 새 명소이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