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뼈아픈 역사의 현장 '오, 仁川!'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1 00:44:52
6.25 뼈아픈 역사의 현장 '오, 仁川!'
세월은 흘렀지만 전쟁은 현재진행형
국군을 맞이하는 시민들. 상륙작전이 끝나자 차이나타운 일대에 숨어 있던 시민들이 오인 사격을 염려해 손을 든 채 국군을 맞이하고 있다. 대불 호텔 쭉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55년. 속절없이 반 백 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6·25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6·25전쟁은 저마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을 뿐, 역사(歷史)로서는 미완의 장(章)이다. 피아(彼我) 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탓이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게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뼈아픈 교훈을 준 민족 최악의 역사이며, 두 번 다시 그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를 밝혀 후세에 전하는 것은 하나의 시대적 사명인 것이다. 그 출발점의 하나로 여기에 간략하나마 일부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당시 정황을 소개한다.
남으로 남으로 피난 행렬
1950년 6월 25일 아침, 라디오에서는 북한의 남침 사실과 함께 정부가 수도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는 방송을 하루 종일 되풀이하고 있었다. 인천 시민들은 이 뉴스를 반신반의하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무엇을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26일, 옹진·연백 지역에서 피난해 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청 직원들은 시청 공터(현 중구청 자리)에 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들어 인천공회당과 각 학교에 설치한 임시 수용소에 나눠주었다. 그러나 시장이 먼저 인천을 빠져나가 시정(市政)이 공백 상태임을 알게 된 시민들과 시청 직원들은 망연자실해 하며 서둘러 피난을 준비했다.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인천의 모든 관공서와 군경(軍警)은 일거에 철수를 단행했다. 일부 좌익 인사들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차량을 징발해 타고 시내 곳곳에서 적기(赤旗)를 흔들며 기세등등하게 시위를 벌였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들은 두려움 속에 이를 냉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시청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를 점거했다.
30일 오후 4시, 기관총과 소총 쏘는 소리가 정적에 싸인 시가지를 뒤흔들었다. 수원으로 후퇴했던 동인천경찰서 소속 전투 병력 수백 명이 인천우체국 부근에 재집결해 시청 쪽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해방군 환영회’를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으나, 총탄에 쓰러진 자가 많았다. 시청 정문 앞에는 10여 구의 시체와 부상자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이날 숨진 이들이 수백여 명에 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7월 4일 0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김포, 부평을 거쳐 인천에 침입했다. 시민들은 인천까지 빼앗겼다는 절망감과 함께 수많은 피난민들이 계산동, 부평동, 장수동을 거쳐 남하하는 것을 보고 경악하면서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시내 전역은 피난민 사태를 이루었다. 일부는 부둣가에 나가 배편을 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남부여대하여 신작로를 따라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소래 방면 도로는 사나흘 간 사람과 차가 밀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산 치하, 숨죽인 시민들
그러나 피난 가지 못한 시민들은 공산 치하에서 도생(圖生)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시민들은 숨을 죽이며 살았다. 시청에는 인천시 인민위원회가, 각 동(洞)에는 동 인민위원회가 설치됐다. 경찰서는 보안서(保安署)로 개칭되었고, 서원들은 무기를 휴대한 채 시내를 순찰하며 주민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각 동 선전실에서는 수시로 종(鐘)을 쳐 주민을 집합시켰다. 선전 요원들은 노력 동원, 의용군 입대, 양곡 수집 등을 강요했다. 청장년들은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인근 산속이나 은신처에서 숨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원통이 고개 근처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9월에 접어들어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전으로 인천 지역에 산발적인 폭격을 가했다. 시내 관공서를 점거하고 있던 북한군은 혼비백산해 낮에는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밤에 나와 행동하였다. 나중에는 그것도 불안했던지 변두리 민가에 잠복하는 등 전전긍긍하다가 급기야 인천상륙작전을 맞았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사령관의 지시 아래 연합군 통합전략기획단에 의해 구상됐다. 9월 12일 2백61척의 대 수송 선단이 부산항을 출발, 9월 15일 월미도를 장악한 데 이어 곧바로 만석동, 옥련동 일대에 일제히 상륙했다. 당시 일부 시민들은 단파방송을 통해 상륙작전이 개시된다는 것을 알고 시 외곽으로 빠져 나갔으나 도심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먼발치에서 상륙작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11시경, ‘그라만’ 전투기 편대들이 새까맣게 하늘을 메우며 시내 곳곳에 산재되어 있던 북한군 시설에 기관포를 퍼붓고, 12시 정각, 함포 사격이 시작되면서 중심가 일부가 불타올랐다. 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은 함포 사격에서 제외되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심경은 참담하였다. 내 고장, 내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폐허로 변해가는 모습을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세, 인천상륙작전
이에 앞서 북한군은 지역 인사 수백 명을 송학동 인천경찰서와 문학동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하고 있었는데 인천경찰서 유치장을 관리감독하고 있던 북한군 제10방어사단 소속 정치보위부 부원 박기분 등은 9월 15일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직전 수감자 102명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중 53명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28명은 중경상, 21명은 살아서 도망쳐 나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인사들이 천재일우로 목숨을 건졌다는 점이다. 연합군의 함포 사격으로 전화선이 절단되는 바람에 인천소년형무소를 관리하던 북한군이 상부 명령을 받지 못한 나머지 수감자 처리에 단안을 내리지 못한 채 패주했던 것이다. 15일 밤, 북한군 주력 부대는 인천시를 빠져 나가 부평과 소사(현 부천 지역)에 새로운 저지선을 구축하고 저항했다.
9월 15일 저녁, 북한군이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거리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시가지가 불타올라 저녁 하늘을 온통 벌겋게 물들였다. 여기저기서 조명탄이 터지고, 기총 소사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가운데 시민들은 동인천경찰서 옆 간장 공장 창고를 열어 밤새도록 밀과 콩 등 양식을 실어 나르느라 아우성이었다.
9월 16일 아침, 시민들은 비장했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우리 해병대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곳곳에 파 놓았던 방공호에서는 패잔병들이 속속 끌려 나왔고, 자유공원 등 시내 곳곳에는 북한군 전사자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9월 17일, 학생들에게는 등교 통지서가 배달되었고, 시내는 평온을 찾은 듯 했으나 주안, 부평, 김포 등지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렇게, 잔인했던 1950년 여름과 가을은 울분과 통한과 비참의 울음 속을 지나고 있었다. 전쟁은 그 후 3년여 간 계속되었다. 특히 중국군(中國軍)의 명분 없는 개입으로 온 국민은 눈보라 속에 1·4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우리는 통일의 기회를 잃은 채 지금까지 분단의 쓰라린 고통을 껴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어찌 우리 이 날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땅의 2세들은 6·25전쟁은 물론 인천의 전쟁사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기성세대들은 부정확한 지식과 시각적 편차를 보이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전사(戰史) 대부분이 승전 기념서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우리 당대사(當代史)를 무관심 속에 덮어두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화해와 협력’을 말하며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역사의식이 새삼 요구되는 오늘인 것이다.
글·사진제공 _ 조우성(시인 /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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