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부두, 잊혀진 만선의 꿈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4 00:46:32
선착장 한 켠에 스러진 풍진 삶이여
인천도시탐사대, 삶의 길을 묻다
공공미술프로젝트 '도시유목2' 1차 탐사가 지난 10일∼14일 화수부두 및 북성부두에서 닷새 동안 진행됐다. 인천일보와 인천문화재단이 후원하고 스페이스 빔이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예술인들로 구성된 인천도시탐사대(탐사대장·민운기)가 대상 지역에 직접 체류하며 그 지역의 도시공간의 특성, 주민들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고 지역 예술에 대한 재발견을 모색한다. 본보는 지난 12일 인천도시탐사대와 동행해 이들의 활동과 화수부두의 모습을 담았다.
# 화수부두, 잊혀진 만선의 꿈
초행길인 사람이 부두를 찾기란 쉬우면서도 어렵다. 화물차가 질주하는 대로에서 이정표를 따라 샛길로 접어들어 5분여 걸어 들어가면 부두가 나온다. 그러나 공장지대로 들어가는 길인지 부두로 가는 길인지 긴가민가하다. 좁은 수로의 선착장 한켠에 어선 십여 척이 정박해 있지만 고즈넉함을 지울 수 없다.
화수부두는 북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흘러들어 갯가에 삶을 의탁하면서 번창했다. 과거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기가 날 땐 부두의 거리는 널어놓은 조기로 생선내가 진동했었다고 한다. 50t∼100t급 철선 70여척과 50t급 목선 20여척이 부두에 상주하며 부두와 바다를 오갔다.
봄철 조기잡이가 끝나면 4월∼7월에는 새우가 성시를 이뤘다. 거리는 새우젓 익는 내가 진동했고 새우가 넘쳐나 새우가 발목까지 잠겼다고 한다. 70년대 말, 동지나해에서 갈치 어장이 터졌을 땐 이곳에서 출항하면 만선을 이뤄 돌아왔다.
잡아온 갈치를 수협공판장에 풀어놓으면 최고 7천만원∼8천만원에 낙찰가를 받았다. 당연히 선주와 어부들의 주머니도 두둑했으며 부두에 의탁한 선박수리업, 얼음공장, 어구상, 술집 등도 호시절을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만선의 꿈을 잊은 지 오래다. 꿈조차 꾸질 않는다. 바다가 매립이 되면서 수로가 좁아지자 큰 배들이 이곳을 찾을 수 없게 되고 어장의 고기도 씨가 마르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바다를 호령했던 선원들도 떠나고 주민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 부두에서 만난 사람들
어민 지원활동을 나온 해경직원과 대원들을 만났다. 해경 대원이 따뜻한 커피를 타줘 추위를 녹일 수 있었다. 취재를 나왔다고 하니 여성 순경이 "기사에 나오는 거냐?"고 묻는다. 글쎄… 확답할 수 없었다.기념 사진을 한 장 찍고 해경 대원들과 헤어졌다.
골목 안에서 쥐치를 다듬고 있는 '평안식당' 사장 안영수(55) 씨를 만났다. 안 씨의 어머니 김성율(84) 할머니가 50년 전 평양에서 내려와 '평안식당'을 열었다고 한다.
안 씨는 "가업을 이어받아 30년 동안 장사를 했지만 문 닫은 지 오래됐다"며 "지금은 생선을 떼다가 손질해 넘겨주는 일로 먹고 산다"고 팍팍한 삶을 전했다.
식료품점 '두경상회'를 운영하는 견춘흥(63) 씨도 "철강공장이 들어오고 바다가 매립되며 고기가 안 잡힌다"며 "이곳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벅차다"고 말했다. 견 씨는 "주변 철강공장에서 날아오는 쇳가루와 매연으로 주민들의 건강도 나빠졌다"며 보상과 이주대책을 마련을 요구했다.
화수부두에서 32년째 '덕인상회'를 운영하는 김연목(73) 할아버지는 쇠락한 부두의 삶에 대해 초연한 편이다.
"배가 들어오면 술집 여자들이 선주 사무실로 몰려들었어. 외상술값을 받으러 온 게지. 그 때는 저 돛대가 우리 배 꺼야 하면 외상술을 주었지. 하지만 고기잡이가 쇠락하며 선주들도 부도가 나고 선원들도 떠났어. 어구를 파는 선구점도 줄줄이 망했지"하고 화수부두의 흥망성쇠를 꺼내놓는 김 할아버지의 이맛살엔 삶의 희비가 교차했다.
# 인천도시탐사대, 삶의 길을 묻다
인천도시탐사대는 부두가 공터에 베이스캠프 격인 천막을 쳤다. 민운기 대장에 따르면 "천막을 쳤을 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던 주민들이 차츰 낯선 이방인들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람 사는 정이랄까?
민운기 대장은 "이곳 삶과 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다"며 "그러나 감상적 차원의 접근을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 대장과 탐사대원들이 경험한 이곳의 삶은 감상 차원에 머무를 수 없는 척박하며 진솔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 대장은 "바다를 기반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부두가 몰락하며 생존 이유를 상실하게 됐다"며 "예술가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조형물을 세우고 사진을 찍는 활동이 이곳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탐사대의 고민도 깊었다. 민 대장은 "관의 논리로 재개발을 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도 반대한다. 하지만 당장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은 없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인간 삶에 대해 섣불리 접근할 수 없다는 이 같은 예술가들의 인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탐사대원들이 이곳 삶에 소박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작업을 찾은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부둣가에 버려지거나 나뒹굴고 있는 폐자재를 모아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이정표는 이상하게도 화수부두와 잘 어울린다.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정치인들의 공약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탐사대원들은 이곳이 지니고 있는 공간적 특성과 인간적 측면, 개인의 삶, 아옹다옹하는 갈등 등 살아남아 있는 모든 생생함을 살려가면서 화수부두 삶의 길을 묻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글·사진=조혁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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