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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일본공사 몰아낸 인천부민

by 형과니 2023. 3. 13.

일본공사 몰아낸 인천부민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4 00:52:47

 

일본공사 몰아낸 인천부민

 

 

 1882(고종 19) 6,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으로 13개월동안 군료를 받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해 오던 구식군대가 봉기했다.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항쟁인 임오군란구식군대의 봉기는 표면적으론 신식군대 별기군의 창설과 그에 따른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이 원인이지만, 본질적으론 대원군과 명성황후, 수구파와 개화파 간에 벌어진 권력싸움에서 비롯된다. 또한 당시 조선 사회에 팽배해 있던 반일·반외세 감정은 난을 확장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이 잇따라 강제 개방되고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시작되면서 궁핍한 생활을 더해가던 조선 민중의 불만과 원망 또한 높아갔다. 지배관료들은 일본에서 수입한 사치품을 사들이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 짜냈고, 일본은 덩달아 조선에서 엄청난 이득을 가져간다.

 

구식군대의 폭동이 간헐적으로 일어났고, 여기에 핍박받던 민중이 가세한다. ·민의 폭동은 188269일 저녁 절정에 이른다.·민들은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한다.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민중의 가세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행위가 바로 조선을 망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인식이 조선 사회 저변에 확산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일반 민중들은 돌을 던지고, 군인들은 활과 총을 쏘면서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와 그 일행은 조선 군·민의 승리의 한호성을 뒤로하고 인천으로 도주한다. 이들은 월미도에서 영국배 플라밍 피시호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간다. 당시 한성 일본공사관 습격으로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인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소위를 비롯해 일본순사 등 13명이 죽는다. 이 중 6명은 도망쳐 온 인천부 청사에서 인천부병과 부민들의 공격으로 죽었다.

 

개항 50년을 기념해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는 당시 인천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일본인 시각이다.인천부사는 임오군란인천사변으로 부를 만큼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다. 임오군란에 따라 조·일간 맺은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 지배를 공고히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민의 습격을 받은 일본 공사관은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인천으로 도망갈 것을 결정한다. 하나부사 공사 등은 남대문을 거쳐 양화진에서 배를 빼앗아 한강을 건너, 다음날 오전 10시경 부평 성곡리에 도착한다. 일행은 오후 3시쯤 인천에 도착, 마중나온 당시 인천부사로 있던 정지용(鄭志鎔)과 부병의 안내로 인천부 청사에 몸을 맡긴다. 하나부사 일행은 정지용이 쌀밥을 지어 주는 등 환대했다고 후술했다.

 

하지만 한성을 빠져나오며 많은 조선 사람을 죽인 하나부사 일행은 인천에 도착해 정지용을 속여 내가 공무로 급히 동래에 갈 일이 있으니 공이 배를 마련해 주십시오라며 한 시각도 지체하지 못하도록 재촉했다. 이에 정지용이 증명을 요구하자 하나부사는 증명을 내보였는데, 이는 경기관찰사로 있던 김보현이 정지용의 처지를 우려해 하나부사의 요구에 따라 준 것이다. 정지용은 후에 하나부사 처리와 관련해 대원군의 소환을 받았으나 가지 않고 음독 자살한다.

 

청사에서 쉬고 있던 하나부사 일행은 돌연 부병의 공격을 받는다. 이들을 추격해 온 무위영 군졸 정의길 등이 대원군의 비밀명령을 전달하자 부병과 부민들이 합세해 부사 청사를 포위, 공격한 것이다. 화급히 탈출을 감행, 겨우 인천부 청사를 빠져나온 하나부사 일행은 제물포에 도착한다. 이 때 죽은 일본인이 6명이고, 5명이 다쳤다.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월미도로 건너가려던 이들은 또다른 저항에 부딛친다. 배를 구해야 하는데 촌민들이 명령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강제로 배를 빼앗아 월미도로 간신히 탈출했고, 때마침 정박해 있던 영국 선박 플라밍 피시호를 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한성 뿐 아니라 인천에서도 강한 저항이 일어난데에는 전국적으로 고조된 반일 감정 때문. 특히 인천은 부산과 원산에 이어 강제 개항(1883)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당초 임오군란이 일어나 바로 그 해가 개항 시점이었으나, 임오군란으로 한 해 늦춰진 것이다. 당연히 개항에 따른 우려가 인천부민들 사이에서도 팽배해 있었을 것. 인천부사가 당시 일행에 돌을 던진 노인이 아직 살고 있다고 기록했듯, 당시 습격에는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부민들이 가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으로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먼저 군대가 움직였으나, 한성 일본공사관 습격과 마찬가지로 인천부민들의 힘이 더해져 일본 공사 일행을 조선에서 내쫓는 성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일본의 조선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를 불러오게 된다. 더군다나 청나라까지 가세해 조선정국은 혼미한 상황을 초래한다. 군대 1개 대대 일끌고 다시 인천을 통해 조선에 돌아온 하나부사 일행은 73일 서울에 도착한다. 청나라 군사 3천명 또한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은 일방적인 요구사항을 담은 책자를 전달하고 회답 기한을 3일내로 한다고 통보했다. 조선정부는 이에 반발, 책자를 반려하지만 결국 조선은 717일 일본 군함 히에이호 선상에서 일본군의 삼엄한 무력적 분위기 속에 불평등 조약인 제물포 조약을 일본과 맺는다.

 

일본은 임오군란에 따른 피해보상을 무리하게 요구하며,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적 지배를 심화하는 법적기반을 마련했다. 제물포조약은 흉도처단, 일본인 사망자에 대한 융숭한장례, 엄청난 보상금과 손해배상, 일본공사관에 병영설치, 일본국에 대한 사죄 등 6개 조항으로 돼 있다. 조선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본의 이익과 요구만을 반영한 굴욕적인 외교였다.

 

인천은 임오군란 이듬해인 1883년 개항했다. 제물포항 일대는 각국 조계가 형성되면서 인천은 식민지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제물포 조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을 사이에 두고 세력싸움을 벌였고, 서구열강이 여기에 가세했다. 조선은 국가 조립기반 자체에 큰 위기를 맞이했고, 결국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사태에 직면한다. 전국에선 의병 물결이 거세게 몰아쳐왔고, 인천에선 강화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김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