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병-이동휘와 의병장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6 00:30:02
백성의 울분 씻어주고자 몸 던진 의인들
6.강화의병-이동휘와 의병장들
1907년 8월 군대해산에 따른 의병봉기는 서울과 원주·강화를 거쳐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그런데 유독 강화도에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으로 평민 의병장이 많았다. 강화의병장의 대표적인 인물 이능권이 이끈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陣)은 주민들로 편성된 유격대로, 이처럼 강화의병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강화도는 고려시대 40년에 걸친 대몽항쟁지였고, 근대들어서는 서양외세의 빈번한 침략을 받은 군사적 요충지다. 그 때마다 강화주민들은 귀족의 사치를 경험했고, 지배관료의 무기력에 설움을 당해야만 했다.
주민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과 평민들의 결속력은 어느지역보다 강했고,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주의식이 면면히 내려온 지역이 바로 강화도다.
▲이동휘(1873∼1935)
1903년 5월 참령(지금의 대령)으로 승진하면서 같은달 26일 강화진위대장으로 부임했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1897년 사관양성학교를 졸업했다. 고종의 두터움 신임을 받았다. 관리들의 비리를 감사하는 삼남검사관 시절에는 군수 14명을 파직시키고, 50만냥의 금전을 압수해 국왕에게 바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1912년 7월29일자 신한민보는 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해 온 이동휘가 1년만에 풀려나 고향인 성진군 융평동으로 간 사실을 전한다. 이 신문은 이동휘가 유배기간 동안 성경연구에 전념했다는 소식을 덧붙였다. 이후 몰래 만주로 빠져나가 간도일대에서 활동한 그는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1907년 8월9일 군대가 해산되고, 강화 군·민들이 봉기하자 그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4개월간 옥고를 치른 그는 서슬퍼런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신민회를 통해 계속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이동휘가 대장을 맡고 있던 때 강화진위대의 규모는 700명이 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905년 2월 진위연대가 진위보병대대로 축소되고, 이어 분견대로 전락하면서 병력은 고작 50여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강화진위대 소속 군인들은 강화에 남아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강화의병이 곳곳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05년 3월3일자로 대장직을 사임한 이동휘는 곧바로 강화에서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벌이게 된다. 대한자강회 주도인물이었던 그는 당시 ‘보창학교’를 설립했는데, 20명 안팎이던 학생수는 후에 14개 학교에 800명으로 늘었다.
군대해산 직전, 서울을 오가던 그는 심상치않은 기운을 감지했고, 1907년 7월24일 기독교인들과 군중집회를 열고 결사항전을 주창했다. 이후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기독교인들과 해산군인 400여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반일집회를 열었는데, 일제는 이를 빌미로 서울에 있던 이동휘를 8월13일 붙잡아 구금했다.
실제로 이동휘는 강화의병을 진두지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강화진위대원들은 물론, 강화주민들에게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능권(1894∼1909)
강화 출신으로 대표적인 강화의병장이다. 본명은 이능한. 1905년 구한국군 육군장교로 고종황제의 밀서를 지니고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는 이준 열사 일행을 무사히 국외로 호송한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
서울시위대 장교로 있던 그는 군대해산령이 떨어지자 고향인 강화도 국화리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정세를 살폈다. 주민들 중 장사를 모아 조직한 민병 ‘대동창의진’은 고작 화승총으로 무장했지만 ‘행동이 매우 날래다’고 전해진다. 점심을 먹던 중 일본군 140명에 포위당하자,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집에 불을 지르고 화염과 연기를 뚫고 한 사람의 부상자 없이 탈출하기도 했다.
20∼30명 규모의 유격전을 펼치며 상당한 전과를 올려 일제와 일진회 간부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다. 전등사에 몰래 숨겨둔 무기를 일본군에게 넘겨준 송계찬을 살해하여 이적 행위자를 처단하기도 했다.
대규모 소탕작전 이전, 이능권 부대와 맞부딛혔던 일본군은 ‘효과가 없다’, ‘소득이 없다’고 상부에 보고할 정도록, 화력의 열세를 유격전으로 극복한 이능권 부대는 정규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대동창의진이 해체된 이후 1908년 8월부터 말엽까지 이호춘, 유성준, 김추옥, 여만복 등과 함께 이능권은 군자금 모금에 주력했다. 일제의 파상적인 탄압과 1년에 걸친 장기항전으로 전력이 고갈됐고, 1908년 12월14일 밀고자로 인해 붙잡혀 이들 4명은 투옥되고 이능권은 교수형을 당한다.
▲연기우(미상∼1914)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성장했다. 1097년 8월9일 군대가 해산되던 날, 부교였던 연기우는 유명규, 지홍윤 등 군인과 주민 550여명과 함께 무기를 내어달라고, 당시 소대장 민완식과 참위 민영락에게 요구했다. 연기우 등은 민완식과 민영락을 내몰고 무기를 탈취, 대오를 정비했다.
이에 앞서 연기우는 전 진위대장 이동휘, 김동수, 지홍윤 등과 전등사에서 의병모집을 결의하기도 했다.
연기우와 지홍윤은 일본군이 3일만에 봉기군을 평정하자, 강화를 빠져나가 내륙에 상륙해 장기항전에 들어간다.
1907년 가을부터 임진강 유역의 연천과 고양 등지에서 허위, 김규식, 권중우 등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했고, 이듬해 1월에는 13도 연합의병부대의 서울공략전에 참가했다. 이 와중에 대대장이더 연기우는 김규식과 함께 부상을 입었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임진강 유역에서 20∼30명 규모의 게릴라전에 전념했다.
연기우는 강화에 있던 이동휘와 김동수 등과 수시로 정보를 교환한 것으로 파악된다. 1909년 3월에는 전등사에서 이들은 밀의하던 중 발각돼 이동휘가 유배당하기도 했다.
활동영역을 강원도까지 넓힌 연기우는 1911년 지리산으로 가 호남의병과 함께 규격전을 계속했다. 야간, 잠복기습 등 대담한 전술을 펼치며 항전하다, 1914년 인제에서 검거돼 순국한다. /김주희기자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 만세운동-인천보통학교서 첫 외침 (0) | 2023.03.13 |
---|---|
정재홍 지사 (0) | 2023.03.13 |
국채보상 운동과 정재홍 (0) | 2023.03.13 |
일본공사 몰아낸 인천부민 (0) | 2023.03.13 |
권평근 지사-광복60년, 인천의 항일운동사 (0) | 2023.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