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홍 지사는...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1-26 00:31:42
정재홍 지사는...
정재홍 지사의 생애를 종합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의 가계도와 본관, 출생연대, 출생지 등 또한 알 수 없다. 그의 활동은 1906년부터 1907년까지 황성신문 등에 나타난 사실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정재홍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머니 밀양 변시와 처 주계 최씨, 아들 종화, 종원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따깝게도 자손들의 소재도 파악할 수 없어 그의 유품이나 사진 등을 구할 수 없다. 보훈대상 신청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은 정재홍 지사의 큰 아들 종화씨는 11살 때 인천감리 서상집의 아들과 상하이로 건너가 대학을 마쳤고,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명학원에서 교편을 잡은 뒤, 상해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임정이 환도할 때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다만 ‘객사했다’는 소식만 전해질 뿐, 그의 생사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둘째 아들 종원씨는 ‘정암’이란 예명으로 희곡작가 진우촌, 무대장치가 원우전, 언론인 고일 등과 인천에서 연극운동을 했다. 고려영화사를 창설하고 무성영화인 ‘쌍옥루’를 찍었다. 영화 ‘낙화유수’에서는 주연을 맡았다. 언제 사망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정재홍은 일찍 실업에 투신해 재산을 많이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교육계에 투신했는데, 인천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설립했다. 그는 교감을 재직하면서 가산 대부분을 학교경비에 사용하는 등 인재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에 생활 근거지를 두었으나, 주요 활동 지역은 인천이었다. 1907년 1월 대한자강회 인천지회를 설립, 인천지역 자강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됐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 회원은 70명에 달했다. 3월에 설립된 강화지회의 경우에는 회원이 48명이었다.
을미조약에 분개, 바로 자결을 결심하지만 국가의 장래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할 일이 있다고 판단해 뒤로 미룬다. 특히 자식된 도리로 늙은 모친을 두고는 자결을 감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07년 6월30일 서울 북서 농상소(農桑所)에서 유지시사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영호 환영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정재홍은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으로 일관했다.
점심식사후 환영행사가 무르익을 무렵, 정재홍은 갑자기 연단 앞으로 나아가 육혈포 자결을 시도한다.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인근 적십자 병원으로 이송된 정재홍은 오후 8시경 숨을 거둔다.
이날 사건은 이등방문 저격사건으로 기록돼 있지만, 사실은 박영효를 저격하려 했던 사건이다. 하지만 정재홍이 왜 박영효를 저격하려했는 지는 불분명하다. 특히 이날 행사는 그가 속한 대한자강회가 주관한 것이었고, 정재홍 또한 대한자강회가 박영효를 방문해 동참을 요청했던 것처럼 박영효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재홍이 대한자강회 내부에서도 급진적인 투쟁방식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유추할 뿐이다. 그의 장례식을 주도한 인물이 이동휘(임시정부 국무총리), 전덕기(상동교회 목사), 최병헌(감리교 목사) 등은 대한자강회 내에 급진파라 할 상동청년회 인물들. 뒤에 신민회 창건의 주역이 된다. /김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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