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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3.1만세운동-황어장터

by 형과니 2023. 3. 13.

3.1만세운동-황어장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6 00:33:42

 

수백명 운집...인천 최대규모 항일 투쟁

 

 3.1만세운동-황어장터

 

 3·1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번졌다. 인천지역에서는 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개항장 일대에서 벌어졌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 만세운동은 강화 온수리에서 일어난 운동이 도화선이 돼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324일 인천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황어장터에서 일어난다. 이 일로 심혁성 지사 등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고, 이은선 등 수 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국적으로 번진 만세운동 소식을 보도하던 매일신보는 1919327일자 신문에 부평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크게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이날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경찰들이 부득이 칼을 뽑았다며 친일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기사는 인천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 소요가 도화선이되야, 인근 김포에서도 일어났고라고 시작한다.

 

 당시 계양면 일대(현 계양구)에는 천도교주 손병희 선생에 감화받은 수십 가구의 천도교 신봉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손병희 선생과 연계해 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부내(富內·부평)와 김포, 계양 서곶 등지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24일 장이 서는 황어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경찰은 313일 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여든 군중을 미리 해산하고 이를 주도한 천도교도 안계식과 김영화를 예비 구속한다. 이후 소래면과 계양면 주민 수백명이 소래산에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으며, 읍내에서도 수백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인천일본경찰서는 강화 온수리 만세시위와 이를 계기로 천도교도들이 부천과 김포, 부평 등지를 오가며 만세운동을 벌이자, 그 형세를 중대하다고 여겨 부평주재소에 순사부장 등 경찰을 파견, 경계를 강화했다.

 

 불온의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일본경찰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하야 23일 순사를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황어장터는 잉어가 나는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부터 잡화와 곡물 뿐 아니라, 1910년대에는 하루에만 소 거래량이 500600여 마리를 넘는 우()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1천여명이 한꺼번에 몰리는 당시 부평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천도교도들은 미리 장터에 나와 있다가, 장이 파하는 오후 2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했다.

 

 “24일 부평읍 시장에서는 당일이 장날이 되어 다수의 한(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을 계기로 삼아, 이 보다 이 곳에 들어와있는 이삼의 소요자 등은 군중을 선동하야 만세를 부르고 부평읍내로 드러가서 면사무소를 파과하였슴

 

 태극기를 손에 쥔 수백명의 민중들은 심혁성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이에 일본경찰은 군중을 해산하려했으나, 기세등등한 대규모 시위대는 몇 시간동안 만세를 외쳤다.

 

 당황한 일본경찰은 주모자 심혁성을 붙잡아 면사무소로 연행하는 한편, 진압강도를 높였다. 이때 주민들은 심혁성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경찰은 이를 무시하고 부내주재소(현 계산동)로 데려갔다.

 

 주모자 몇 명을 검거하였는데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기세가 높던 다수의 군중은 검거된 범인을 빼았고저 돌은 경관에게 던지고 또는 달려든 자도 있어서 위험이 시시각각에 있었음으로 경관 등은 부득이 발검하여 위협하였으나

 

 임성춘 등은 일본경찰에 심혁성을 풀어줄 것을 채차 요구했고, 군중들은 심혁성을 데려오기 위해 일본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이 때 앞서 있던 이은선이 일본경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쓰러지고 윤해영 등 56명이 크게 다쳤다.

 

 이에 분개한 주민들과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나섰다.

 

 격분한 주민들은 선주지리에 있던 면서무소 서기 이응경이 친일적인 혐의가 있다고 판단, 그의 집을 부수기도 했다. 또 주민들을 억압하고 탄압했던 면사무소도 파괴하는 등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했다. 당초 시위를 주도한 천도교도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 장날 시위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나, 면사무소 직원들은 이를 거절했다.

 

 범인을 호송하여 주재소로 데려왔다는 급보가 인천경찰서에 달하였슴으로 본서에서는 그날 즉시 (판독불능) 경부가 순사 열명을 데리고 동네로 급행하였다더라.”

 

 이날 만세운동으로 3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중 이담은 징역 2, 임성춘은 징역 1, 최성욱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 심혁성은 3월에 처해졌다.

 

 징역살이를 끝낸 심혁성은 가산을 다 팔아 그 돈으로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홀연히 고향을 떠났다. 이후 처자를 거느리고 산골로 은신, 심산유곡을 30년 가까이 방랑하며 약초를 캐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만주 등지에서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이외에 인천의 각 섬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용유면 남북리에서는 조명원·조정서·최봉학·문무현 등이 23일과 24일 모여 혈성단이란 모임을 만들어 거사를 결의했다. 이들은 직접 광목천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자신들의 이름을 써 넣은 뒤 남복리와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등을 다니며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28150명의 군중이 관청리 광장에 모여 기세를 떨쳤고, 을왕리에서도 대한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이 일로 관련자 전원이 체포돼 2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이는 강화도에서 먼저 난 만세시위가 도화선이 돼 일어났다.

 

 구한말 진위대 군인으로 이동휘 직계 부하였던 유봉진·황도문을 비롯해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 연일 수백수천명이 모이는 등 당시 경기도 일대에서는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이게 된다.

 

 강화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3월중순에서 시작, 4월중순까지 1개월간 13개 면 전역에서 일어났다. 장날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각 동리 단위로 초저녁에 산위나 언덕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일도 많았다. /김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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