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대 강화 만세 운동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6 00:34:39
2만여 주민 `독립만세' 물결
3.1만세운동-전국 최대 강화 만세 운동
강화 3·1운동은 3월중순에서 4월중순까지 한달간 13개 면 전지역에서 일어났다.
그 중 18일 장날을 맞아 온수리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벌어진 시위 중 최대 규모다.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밤 11시까지 평화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기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시위현장에서 질서 정리에 나서기도 했고 일부 한국인 출신 경찰들은 시위대가 나눠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만에 일본군 수비대가 급파, 장터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했다. 장터에 나온 사람은 모두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고 여기고 잡아들여 갖은 고문을 가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상업학교 학생들의 동맹휴업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3월12일. 강화보통학교 학생들은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며 운동장으로 나가려다 교장과 직원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이 소식은 매일신보 3월16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3·4학년 학생 전부가 집합해 칠판에 구한국기를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중략) 또 13일 정오에 여자부 생도 80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름으로 즉시 순사 수명이 가서 정지케 한 후(중략) 남학생 수명을 경찰서에 불러 타이르고 반성케 하고 시내를 엄중히 경계했다.”
학생들의 운동으로 시작한 강화도의 3·1만세운동은 장날인 18일 그 기세를 높인다.
구한말 진위대 군인으로 이동휘 직계 부하였던 유봉진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화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한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유봉진은 8일 온수 감리교 목사 이진형의 집에서 황유부, 황도문과 회합을 하며 동지를 규합한다. 황도문은 5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강화에 피신 중이었다. 이들이 결성한 ‘결사대’는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 18일 장날 우체국에서 ‘인경’(정오를 알리는 종소리) 소리에 맞춰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보부상을 비롯해, 인근 김포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1만여명이 장터에 모였다. 결사대의 만세소리를 시작으로 장터에 모인 사람들과 강화도 주민들이 합세, 순식간에 시위대는 2만명을 넘어섰다.
장터에서 시작한 시위는 향교를 거쳐 강화군청에 이르렀다.
매일신보는 3월21일자에 이날 시위소식을 이렇게 전한다. “강화도에서는 18일 오후 2시 시장에서 교인(천도교와 기독교)들을 중심으로 많은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 강화군에 달려가고 혹은 경찰서를 음습하였으나 폭행한 일은 없었다(중략) 오후 8시30분 일시 해산하였으나 다시 시장에 집합하여 오후 11시 겨우 해산했다”
이날 보도에는 속보 형식으로 일본군 수비대가 19일 오전 부터 경찰과 함께 시위 주모자를 검거중이라고 덧붙였고, 다음날 같은 신문은 수비대가 체포한 사람을 취조하고 있으며 강화도 형세가 평온하였다고 전했다.
하지만 매일신보가 평온했다고 전한 이날(19일) 오후 길상면 온수리에서는 천도교도 수백명이 교당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매일신보는 이 소식을 24일자에 보도했다.
온수리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경찰과 보병의 진압으로 천도교도장 구덕희가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북상해 불은면 두운리(면소재지)로 전파됐고, 교동면과 삼산면, 서도면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18일 벌어진 온수리 대규모 시위는 21일 하점면 망월리로 이어졌다. 교동도에서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이나 만세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3일 화도면 사거리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27일에는 강화 전체 9곳에서 2천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때부터 시위대는 군청에 돌을 던지거나 친일파에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고,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하기에 이른다.
29일부터는 시위가 밤에 이뤄진다. 월곶리 주민 100여명이 횃불을 들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횃불은 마치 봉화가 이어 오르듯 강화읍을 거쳐 하점면에 이르기까지 13곳으로 번졌다. 4월7일 삼산면, 8일 석포리, 양도면 인사리에서, 9일 석모리와 양도면 삼흥리·산문리, 10일 불은면 고능리와 두울리, 11일 양도면 도장리와 길정리, 13일 불은면 두물리에서 만세소리와 함께 횃불을 드높였다.
강화 3·1운동은 장날을 이용한 대규모 시위와 함께, 각 동리 단위로 초저녁 시간에 산 위나 언덕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른 특징을 보여준다.
매일신보 4월5일자에 이어 7일자 기사에 계속되는 강화 시위소식을 전하며 “밤 8시만 되면 사람들이 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고 ‘횃불시위’ 소식을 보도한다.
강화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인근 김포로 이어진다.
매일신보는 3월25일자 신문에 장날인 22일에 맞춰 군하리에서 군중 수백명이 시위를 벌였고, 주모자를 체포했다는 경무총감부 발표내용을 실었다.
이어 4월11일자에는 “강화에 소요가 일어나자 김포군에도 파급되어 수천의 군중은 각처에서 소요를 일으켰으나(중략)”라고 싣고 김포군수와 유지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사람들을 설득, 사상자를 내지 않았다고 보도한다.
강화 3·1운동은 주모자들이 잇따라 체포되면서 4월 중순에 접어들어 잦아든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4월30일자에는 강화군청과 경찰이 ‘소요사건에 대한 계고장’을 붙였고, 군민들도 평온을 되찾았다고 보도한다.
매일같이 강화 전역에 울려퍼지던 만세소리가 잦아들고, 보름이 지난 5월6일자 매일신보는 ‘강화의 출판법 위반자 검거’ 소식을 전한다.
18일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과 황도문 등은 ‘국민회보’라는 신문을 찍어 발행했는데, 경찰이 이에 가담한 사람들을 붙잡아 서울로 압송한 것이다. 이들은 교사와 학생, 보험회사 직원, 잡화상 등 8명이었다.
유봉진은 시위 주도후 마니산 참성단에 올라 숨어있다가, 일제가 부모를 붙잡아 고문하자 내려와 자수했다.
황도문은 장봉도로 도망쳐 등사판을 숨겨놓은 뒤, 제물포에 숨어들어 계속해서 독립선언서를 뿌렸다. 이후 강원도 등지에서 3년간 숨어 다니다 강화로 돌아와 북도면 신도리에 기독교 계통의 신흥학교 교사가 됐다. 황도문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강화 3·1운동으로 기소된 사람은 모두 39명으로, 이 중 유봉진, 염성호, 유희철,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1919년 3·1운동 후 일제의 무단정치는 문화정치로 바뀐다. 민족독립운동 또한 점진주의와 급진주의로 갈라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 때부터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민족독립과 연계된 계몽주의 운동이 펼쳐진다.
인천에서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청년운동이 서서히 일어난다. /김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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