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계발.체육활동으로 `민족정신' 배양
仁川愛/인배회
2007-01-26 00:36:17
지식계발.체육활동으로 `민족정신' 배양
3.1만세운동-청년운동의 태동
3·1운동을 고비로 일제의 살벌했던 무단정치도 고개를 숙인다. 문화정치로 돌아선 일제는 사회·문화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허가한다. 이 시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한다.
인천에서도 이런 사회풍조에 맞워 많은 단체들이 생겨난다. 특히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청년단체와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 그리고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 생긴 많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이끌던 노동운동 세력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이들은 10여년간 각종 강연회나 운동회 등을 통해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애국운동을 벌이는데 앞장섰다.
3·1운동 이후 한국의 민족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의 전진과 동시에 그 안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후 1923년 사회주의 운동이 분리되고, 1925년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대립하는 양상을 띤다. 1926년 6·10 만세 운동이후 노골적으로 대립해 오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 협동·제휴하는 통일적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인천에서 벌어진 청년운동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인다.굳이 기간을 나눈다면 3·1운동 이후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이 창설되기 전까지 민족주의계 청년들의 실력양성운동이 활발했다. 이후 1927년까지는 사회주의적 청년운동이 중심이 됐고, 1927년 8월부터는 신간회를 중심으로 좌익과 우익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부터 일제의 탄압이 강력하게 들어왔고, 1931년 조선청년총동맹이 해체되면서 청년운동은 급격히 약화된다.
1920년대 초반 인천지역의 청년운동은 엡윗청년회와 인배회, 한용단을 중심으로 한 강연과 토론 등 지식계발, 체육활동이 주가 됐다.웹윗청년회는 감리교회 창설자인 요한·웨슬레의 출생지 ‘웹윗’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1872년 3월 미국에서 태동했다. 한국에서는 1897년5월5일 한국선교회 내 ‘한국 웹윗청년연합회’가 조직되면서 출범했지만 ‘민족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1906년 6월) 된다.
‘내리 100년사’에 따르면 그 후 2년쯤 뒤 내리교회(당시 제물포교회)가 청년회 부활을 요청했으나 일제 성향의 한국선교회를 이를 묵살한다. 이에 내리교회가 독자적으로 청년회를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독청연운동을 벌이게 된다. 서울지역에서는 1920년대 조직이 재건, 인천이 이보다 12년 앞선 것이다.
1907년 내리교회 영화학교에서는 교회유지 청년인 박삼홍이 중심이 돼 학생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내리 웹윗청년회는 이와함께 각종 계몽강연회와 음악회, 전도대회 등을 통해 선교활동과 민족정신을 함향하는데 앞장섰다.
1919년 웹윗여자청년회가 별도로 조직되고, 1923년에는 남, 녀 청년회가 병합되고, 소년회가 조직된다. 내리웹윗청년회에서 민중계몽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선 인물에는 박삼홍을 비롯해, 하상훈, 서병훈, 최진하, 이동오, 이범지, 홍호 등이 있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웹윗청년회의 토론회와 강연회를 알리는 기사가 많이 실렸다.
1920년대 초반, 속속 청년단체들이 조직된다. 웹윗청년회원이었던 하상훈이 관여한 조직으로 ‘이우구락부’가 이 시기 만들어지는데, 이는 인천 최초의 국악관련 모임이다.
동아일보 인천지사의 도움으로 결성한 국악애호모임으로 최선경, 송균, 서병훈, 나시극, 전두영 등이 모여 우리 국악을 지키려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활동다운 활동을 해보지 못했다. 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옛 축현초) 앞에 동아일보 인천지사 사무실이 있었다.
일제시대 주권을 잃고 설움에 복받친 인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준 것이 ‘야구’다. 인천한용단(동아일보 1920년 6월13일자)과 일본팀의 경기가 있을 때면 인천시대 모든 상가는 문을 닫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하고 남는다.
인천한용단의 전신이 바로 ‘경인선통학생진목회’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한세기’에 따르면 당시 인천에는 인천공립보통학교와 박문학교, 영화학교(이상 한국측), 신흥초, 축현초(일본측) 등 초등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에서 매년 200∼4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졸업했는데, 중등학교는 인천남상업학교와 인천북상업학교, 인천고등여학교가 고작이었다. 부득이 서울로 유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20년 경인선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통학생수만 한국·일본인 합쳐 무려 300명에 이르렀다.
곽상훈, 전종혁, 조진만, 고일, 고유섭 등이 경인선통항생친목회를 만들었고, 여기서 파생된 것이 인천한용단이다. 인천한용단은 나중에 한용청년회로 이름을 바꾼다.
통학생 중 배제학교에 다니던 20여명이 따로 모임을 만들어 인배회라고 했다. 인배회 출신 학생 중 회장을 지낸 이길용은 동아일보 본사 체육부 기자가 됐는데, 바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의 장본인이다.
경인선통학생친목회 회원들은 이후 인천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여러 단체를 만들거나 관여하게 된다. 1923년 말 생긴 제물포청년회나, 1926년 만들어진 신문기자단과 칠면구락부, 인천청년연맹 등이 있고, 이후 신간회 인천지부(1927년12월5일)에서도 주도적인 인물로 나선다.
제물포청년회는 인천청년연맹(1925년)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인천지역 청년단체의 연합체다. 1926년 1월2일 인천지역 단체 대표 100여명이 모여 신년모임을 열고, 활동보고와 청년운동 활동 전반에 걸쳐 회고하는 시간을 가지려했으나, 중간에 경찰의 제지로 중단됐다. 이 모임은 후에 인천청년동맹으로 바뀐다.
1920년 7월4일자 동아일보는 ‘인천노동야학유망’이라 제목의 기사를 싣는다. 인천에 사는 하선운씨외 9명이 야학을 열었는데, 회원이 130명이 넘었고, 학생이 70명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듬해 6월7일자 기사에서는 ‘인천노동야학발전’이란 기사도 실린다.
하선운은 박창한, 김태현, 유순근, 김선순, 이동오, 고일 등과 함게 인천노동동맹을 조직한다. 인천노동동맹은 1923년 박창한이 주도한 소성노동회가 전신이다. 이 모임은 1921년 소성야학회가 모태다.
인천노동동맹은 인천노동총연맹(1926년 4월)으로, 또 인천노동조합(1927년 1월)으로 조직을 바꾼다. 인천노동조합은 인천청년노동조합이 가세한 조직이다.
인천의 노동운동 조직은 노동공제회 인천지회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전국규모의 조직을 가진 노동공제회의 인천지회로, 1920년 6월25일 내리교회에서 발회식을 갖고 창립했다. 당시 참석한 인원이 800명을 넘었다. 당시 노동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유두희, 권평근, 박창한 등이 있다.
청년운동 뿐 아니라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운동도 벌어진다.신태범 박사의 인천한세기에 따르면 1922년 중앙고보 체조교사 조철호씨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조선소년군 제1호대’라는 이름으로 보이스카우트가 조직됐다. 강한 군인정신과 민족정신으로 화제가 됐다.
뒤이어 중앙기독교청년회가 주도해 ‘소년척후대’가 탄생했고, 1925년 내리 웹윗청년회가 주동돼 ‘내리소년척후대’가 태어난다. 이들을 통칭 ‘인천소년군’이라 불렀는데, 운동경기와 수기통신, 야영연습, 줄매기 등을 배웠다. /김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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