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땅에 민중계몽 꽃피워
仁川愛/인배회
2007-01-26 00:37:36
복음의 땅에 민중계몽 꽃피워
내리교회 엡웟청년회
1920년 5월30일자 동아일보는 엡웟청년회가 인천내리교회와 영화학교의 도움으로 ‘야학교’를 만든다고 보도한다. 같은 해 6월5일 개교한 이 학교는 상점원과 직공을 대상으로 한문과 어학, 산술 등을 가르쳤다. 1년 뒤에는 영어야학도 별도로 개설했다.
한국선교회 산하 엡웟청년회는 선교활동은 물론, 민족 애국 운동에도 적극 나선다.특히 인천 내리교회에 있던 청년회는 인천지역 내 다른 청년조직보다 활발한 활동상을 보여주는데, 야학교 운영, 각종 강연회, 토론회 개최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계몽 활동을 벌이거나, 다양한 문화 공연 활동에 나선다.
엡웟(Epworth)청년회는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요한·웨슬레의 출생지명이자, 그의 아버지 사무엘·웨슬레 목사의 목회지인 ‘엡웟’에서 따온 말이다.이 청년 운동은 1872년 3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감리교회의 닐리 목사가 처음 시작했고, 이후 1889년5월14일 미국 감리회 엡웟청년회 연합회로 발전했다.
엡웟청년회의 목적은 ▲선교 활동 및 선교사 양성사업 ▲기독교적인 사회개혁운동과 절제운동 ▲기독교적 박애사상 실현 ▲감리회 청년을 위한 문학 및 사회활동 등이다.
한국에 이 청년운동이 처음 들어온 때는 1897년 5월5일. 제13회 한국선교회(미국 조이스 감독 주관)에서 한국 엡웟청년연합회를 승인하면서부터다.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인 존스가 연합회 총무로, 또 교회 전도사인 김기범 목사가 지도위원으로 각각 피선됐다. 이 때부터 인천 내리교회에서 엡웟청년회가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엡웟청년회는 전도부와 인제부, 학문부, 다정부, 통신부, 회계부 등의 조직으로 구성됐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일제 통감부에 의한 식민지 압제정치가 노골화되면서 엡웟청년회 또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비민족화를 내세우던 외국 선교사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급기야 엉뚱한 구실로 연합회 조직을 해체하기에 이른다. 한국선교회는 청년회가 종교활동의 범주를 벗어나 정치활동을 한다는 표면적 구실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1906년 6월13일 제2회 한국선교회 모임 때 연합회는 자진해산을 결의한다.
그러나 청년회 내 회원들은 식민지 한국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외국 선교사들, 특히 재한 미국 선교관리부에 대한 불신과 친일적 태도에 혐오감을 갖게 된다.
해산 이후 2년 뒤인 1908년3월16일 제4회 한국선교회 제5차 집회에서 내리교회(당시 제물포 교회)는 엡웟청년회를 재조직하자고 요청한다. 그러나 당시 친일적 성향의 한국선교회 감독인 해리스는 이를 거부한다.
내리교회는 해리스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청년회를 부활시킨다. 서울지역 교회들이 1920년에야 청년회 조직을 재가동했으니, 내리교회는 무려 12년이나 앞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 이후 발행한 동아일보에 내리 엡웟청년회의 활발한 활동상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전 활동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재조직한 내리엡웟청년회는 문맹퇴치 사업과 연극 공연, 민심계도, 선교활동 등 민족주의적 성향의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시 내리교회가 설립한 영화학교의 교육상을 살펴보면 이해할 만하다. 내리교회 유지인 청년 박삼홍은 자산을 털어 국악기와 소총을 마련해 1907년부터 영화학교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박삼홍을 비롯해, 하상훈, 최진하, 이동오, 이범진 등이 당시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에는 박남칠, 정우, 허영생, 갈홍기 등이 참여한다.
이후 1919년 내리 엡웟청년회는 여자청년회를 별도로 조직하며, 청소년 문고를 개설한다. 1923년 분리됐던 남·녀 청년회는 다시 병합되고, 별도의 소년회를 조직하게 된다.
이 때 담임목사가 바로 신홍식 목사다.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방에 고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한국에 대한 통치방식을 바꿔, 문화정치를 편다. 이 때부터 합법적인 청년·사회 운동조직이 민족운동을 벌이게 된다.
엡웟청년회도 이전보다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특히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나선 신홍식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인천지역에서 민중계몽사업에 앞장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은 신문기사 상에 뚜렷이 나타난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많은 청년조직이 등장,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한용단, 인배회, 이우구락부 등이 그렇다.
이들의 활동상은 당시 신문인 동아일보에 담겨 있는데, 1920년부터 1926년까지 동아일보 기사만 봐도, 두드러진 엡웟청년회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기간 기사화된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강연회와 토론회는 33회. 이 중 엡웟청년회 관련 기사가 29건이나 된다.
토론회나 강연회의 주제 또한 선교활동에 머물지 않았다. 청년의 사명이나, 여성문제, 자녀문제, 자녀교육문제, 수양, 덕행, 인격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청년의 사명에 대한 강연회가 많았다. 이밖에도 각종 음악회나, 연극활동 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벌였다.
1920년대 엡웟청년회의 회장은 하상훈이었고, 여자엡웟청년회(1921년)는 안인애가 회장 있었다. 1923년 통합 후 선출된 회장은 홍호, 부회장은 김옥경이었다.
내리 엡웟청년회가 ‘종교’를 기반으로 한데 모여 활동했다면, 인천한용단의 전신인 경인선통학생친목회는 통학 수단인 ‘기차’를 중심으로 모였다.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중심이 된 경인선통학생친목회 회원들은 이후 인천의 청년·사회·예술 운동 조직의 근간이 된다. 야구로 유명한 인천한용단을 비롯한, 한용청년회, 신문기자단 등 청년운동은 물론, 노동운동조직에서까지 활동하기에 이른다. /김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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