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임시정부와 만국공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6 00:35:23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과 자유'선포
3.1만세운동-한성임시정부와 만국공원
인천시내 만세운동이 잦아들던 1919년 4월2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일단의 사람들이 비밀리에 모였다.이규갑, 홍면의, 안상덕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한다. 바로 일제하 민족진영의 상징적인 국가인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한성임시정부’다.이들은 4월9일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 등 내각을 구성한 뒤, 같은달 23일 서울 선린동 봉춘관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출범한다. 당시 지하신문인 ‘독립신보’은 4월10일 한성임시정부 초대내각 명단을 실은 호외를 발행한다.
독립신보는 1919년 3월 창간했다. 총독부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항일 지하신문으로 창간호에 태극마크에 관한 해설을 담은 논설을 통해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이어 독립문 삽화를 싣고, 일제의 한국동포 학살만행을 고발하는 등 줄곧 항일 논조로 일관한 신문이다.(호외, 백년의 기억들 중·1997년 8월 정운현 지음)
이 신문이 4월10일 발행한 호외는 일제의 단속을 피해 등사판으로 급히 제작한 탓인 지 ‘집정관 이승만’과 ‘총리 이동휘’의 이름을 서로 뒤바꿔 보도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 신문이 호외까지 발행하며 소식을 전한 ‘한성임시정부’는 3·1만세운동 직후 나라 안팎에 생겨난 6개의 임시정부 중 하나다.
1910년 이래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경찰제도를 바탕으로 무단정치을 펼치며, 조선 민중의 항일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조선(한국) 고유의 문화는 말살위기에 몰렸고, 한민족의 경제발전은 극도로 제한됐다.하지만 일제의 폭압은 항일운동을 이끌던 지식인과 학생, 종교인 뿐 아니라, 농민·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반일·항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극도로 높아진 반일·항일 감정은 때문에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민중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게 했다. 3·1만세운동은 모든 계층이 하나로 통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특히 무정부 상태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단결할 수 있도록 했고, 국가간 교섭을 담당할 ‘정부’의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한성임시정부 또한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구성됐다.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3월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현구, 이용구,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하고, 13도 대표들이 4월2일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모인다.일설에 따르면 이날 각계 대표들은 한성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자료는 이날 비밀모임은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선포계획을 결정한 자리로 밝히고 있다.
만국공원은 1888년11월9일 해발 69m의 자그마한 야산 응봉산(또는 응암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처음 ‘각국공원’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이 공원이 제물포항(인천항) 개항 이후 개항장 일대에 설치한 각국 조계(租界)지역의 완충지대였기 때문이다. 조계 지역은 조선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청나라, 일본 등 각국의 외교관들이 공동서명하고 러시아 토목기사 마틴이 측량해 공원의 모습을 갖췄다. 조선땅에 설치한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이나 다름없다.
이후 일제가 현 인천여자상업고 자리에 설치한 ‘인천신사’를 ‘동공원’이라 불렀고, 1914년 각국 지계 제도가 철폐되면서 일본인들이 그 서쪽에 있는 만국공원을 ‘서공원’(니시고엔·西公園)으로 고쳐 불렀다.일제는 무단통치기에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39년 확장공사 때에는 부역을 부과했다. 신사가 민족정신을 말살한 상징이듯, 만국공원 또한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설움을 상징한 공간이다. 그러나 만국공원은 나라 잃은 설움을 잊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공원 밑에 삼태기처럼 생긴 분지모양의 땅 ‘웃터골’(현 제물포고)은 천연 경기장으로, 1920년 확장공사에 들어가 1926년 공설운동장으로 면모를 갖추게 된다.1935년 인천중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각종 운동경기 대회가 이 곳에서 열렸다.특히 경인선 기차통학생 모임인 ‘한용단’ 학생들이 일본 야구팀을 이길 때면 위축된 인천 사람들의 응어리진 마음이 한껏 풀어지기도 했다. 한용단은 매주 일본인 미두취인소 ‘미신’(米信) 팀과 라이벌 야구경기를 열었는데, 이날이면 만국공원 일대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인천한세기 저자 신태범 박사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놓고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열병에 들뜬 것처럼 웃터골로 모였다. 어른들은 빈 석유통을 두드려 가면서,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으로 마음껏 떠들어댔다.”‘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인천지역에 울려퍼져 나가고 있을 즈음, 3월9일 만국공원에서는 기독교인 수백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려다, 일경에 강제해산 당하는 일도 있었다.
13도 대표들이 비밀회동 장소로 만국공원을 선택했는지, 사료상 밝혀진 부분은 없지만 이런 만국공원의 역사적 상징성을 염두해 두면 이해할 만하다. 만국공원은 식민지 조선을 상징하는 공간이면서도, 식민지 조선인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4월2일 비밀회동에는 13도 대표 및 각계 대표자들이 참석한다. 천도교도 대표 안상덕, 예수교 대표 박용희, 장붕, 이규갑, 유교대표, 김규, 불교대표 이종욱 등 20여명이었다. 이들은 이날 임시정부 조직과 파리평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해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하는 일 등을 협의한다.
이에 따라 1주일 뒤인 9일 한성임시정부의 초대 내각을 발표한다. 23일에는 서울 선린동 봉춘관에서 3천여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인 가운데 한성임시정부 출범하며,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과, 조선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포했다. 이와함께 결의사항, 각원 명단, 파리강화회의 대표, 6개조의 약법(約法), 임시정부령 1, 2호를 발표한다.
이후 국내외의 난립한 임시정부는 통합논의에 들어간다. 상해임시정부는 “정부의 위치를 상하이에 두되,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하고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임을 인정한다”며 합의점에 도달한다. 상해임시정부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를 흡수하고, 내부를 개혁해 한성임시정부와 일체화함으로써 한국 유일의 임시정부가 탄생한다. /김주희기자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물포항서 출발한 멕시코 이민 그후 100년-1.잊혀진 그들의 세월 (0) | 2023.03.14 |
---|---|
지식계발.체육활동으로 `민족정신' 배양 (0) | 2023.03.13 |
전국 최대 강화 만세 운동 (0) | 2023.03.13 |
3.1만세운동-황어장터 (1) | 2023.03.13 |
3.1 만세운동-인천보통학교서 첫 외침 (0) | 2023.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