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항서 출발한 멕시코 이민 그후 100년-1.잊혀진 그들의 세월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7 00:30:51
역사속에 버려진 1천33명
기획>제물포항서 출발한 멕시코 이민 그후 100년-1.잊혀진 그들의 세월
1905년 4월4일, 조기획>제물포항서 출발한 멕시코 이민 그후 100년-1.잊혀진 그들의 세월선인 1천33명을 실은 배가 제물포항(인천)을 떠났다. 이들을 실은 배는 일본 요코하마항을 거쳐 태평양을 횡단, 멕시코 살리나크루스라는 곳에 입항했다. 기차로 갈아탄 이들은 대륙을 건너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농장에 계약노동자로 분산 배치됐다. 이렇게 해서 조선인의 한많은 멕시코 이민사는 시작됐다. 올해로 꼭 100년이다. 이들은 무슨 인연이 되어 ‘묵서가(墨西哥)’로 불리던 생소한 땅으로 머나먼 길을 떠나야 했는가. 잊혀진 멕시코 이민 100년 세월을 되짚어보는 특집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1.잊혀진 그들의 세월
“우리는 이 곳에 살면서 한번도 고국과 연결고리를 가져본 일이 없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와서 연결의 끈이 이어졌더라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말을 하며 한국의 문화와 정신을 갖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말을 남긴 한 후손은 10년전에야 멕시코 국적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100년전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이민 1세 1천33명 가운데 현재 생존인물은 없다. 마지막 1세대 생존자는 1989년 104세를 일기로 한많은 삶을 마감한 김흥순(金興順)할머니로 지금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 티후아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생존 후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멕시코 도착 3개월뒤 태어난 한인 2세 고흥룡(高興龍·아순시온 코로나 김·100세) 옹이다. 고령인 지금도 한글 성경을 읽고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고 옹을 비롯한 불과 수 명만이 현재 몇마디라도 한국말을 할 수 있는 후손들이다.
‘역사적 기민(棄民)’이란 말로 대표되는 멕시코 한인의 처지는 이민 100년을 맞는 2005년 현 시점에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멕시코의 한인들은 100년의 세월 대부분 시간 조국에게서 버려졌고 잊혀졌던 존재였던 것이다.
지금도 메리다를 비롯한 멕시코 곳곳에는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도 망각한 그야말로 뿌리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후손들이 상당수에 달한다.
해방되기까지 40여년 긴 시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민 1세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더욱이 한국인 국적자가 한 명도 없는 ‘한인 후손 멕시코인들’ 3만∼4만명은 100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1904년 10월부터 유카탄 에네켄 농장 이민 브로커 네덜란드-독일계 영국인 존마이어스와 일본 대륙식민합자회사는 국운이 기울어가던 조선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멕시코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우여 곡절 끝에 1천33명의 한인 이민자들은 영국 상선을 개조한 일포드 호를 타고 멕시코 태평양 연안 살리나 크루스 항구에 도착했다.
40여일 항해 중 아이 둘과 어른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이 태어났다. 1천33명 이민자들 중에는 남자 702명, 여자 135명, 아동 196명이었다. 단독이민으로 볼 수 있는 9∼15세 부랑아 집단 약 300명, 구한말 퇴역군인 200명이 숫적으로 가장 우세하고, 다음으로 소작인, 잡역부, 전직 하급관리, 소수의 양반계급, 걸인 등이었다. 무당과 신부 각 1명, 내시도 3∼4명 포함됐다.
살리나 크루스에서 곧바로 이들은 태평양∼멕시코만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테우안테펙 지협을 기차편으로 10시간 만에 관통해 코앗사 코알코스 항구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다시 메리다 북쪽 35㎞ 지점에 있는 프로그레소 항구에 1905년 5월14일 오후 3시 도착한다. 이어 기차를 타고 저녁 8시 출발해 메리다 시내에는 당일 밤 11시에야 들어올 수 있었다. 이들은 메리다 일대 에네켄 농장 20여 곳으로 힘센 사람부터 뽑혀 흩어졌다.
그리고 4년간 계약노동이 시작됐다. 한인들은 에네켄 잎을 따는 일(펭카)을 주로 했다. 노임에서 이민비용을 공제해 가는 방식이 아니라 4년을 채우면 이민비용을 전부 감해주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4년간은 의무적으로 일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이민 경비를 지불하고 곧바로 풀려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노예이민’이란 표현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909년 계약노동이 끝났지만 한일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났다. 이로부터 한인들의 유랑생활, 즉 디아스포라(Diaspora) 시기는 시작되면서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지게 된다. 현재 후손들은 메리다에 약 5천명이 살고 이밖에 멕시코시티, 티후아나, 베라크루스, 오아하카 등도 후손들이 많은 지역으로 꼽힌다.
한편 1921년 288명이 쿠바로 제2의 이민을 떠나 인구증가의 분산을 초래했다. 쿠바에는 수도 아바나, 마탄사스 등지에 약 700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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