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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권평근 지사-광복60년, 인천의 항일운동사

by 형과니 2023. 3. 13.

권평근 지사-광복60, 인천의 항일운동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24 00:49:41

 

1.권평근 지사

사회주의 노동운동 선봉...60년만에 햇빛

 

 <광복60, 인천의 항일운동사>

 

 1.권평근 지사

 

 광복 60주년을 맞아 정부는 최근 의미있는 결정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항일운동 인사들 중 그동안 외면해왔던 사회주의 계열 인사 54명에게 독립유공 서훈을 추서했다. 인천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통해 항일에 나섰던 권평근(權平根·19001945)지사가 서훈을 받았다. 인천은 일제치하에서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던 지역이다. 개항장으로서, 신문물의 첫 도래지였던 인천은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인천의 노동운동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며 항일의 핵으로 발아, 전국적으로 전파됐다. 그 중심에 있었던 권평근 지사. 그가 60년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194598, 우리나라가 일제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맞은 지 불과 20여일이 지난 이날 인천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해방군으로서 국내에 진주한 미군이 인천에 첫 발을 내디딘 날, 일본 경찰이 환영행사에 나섰던 인천인들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일제치하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어왔던 권평근 노동조합위원장과 보안대원 이석우(26)가 즉사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해방후 진주한 미군의 성격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천황의 항복선언이후 전전긍긍했던 일본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며,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미군은 또 다른 지배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권 지사의 죽음은 인천 전체에 애도의 물결을 몰고 왔다. 권 지사의 장례는 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인천시민장(당시에는 부민장)으로 치러졌다. 인천시 인민위원회에서는 추모비석을 세우기로 결정했으며, 다음 해 노동절 기념행사에서 권 지사에게는 3만명의 인파가 모인 자리에서 표창이 수여됐다. 이렇듯 60년전에 이미 인천의 독립투사로 인정받았던 권 지사. 이념의 묵은 틀에 묵혀 음지에서 지내야했던 그가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나온 셈이다.

 

 권 지사는 1900126일 가화군 양도면 능내리 118에서 출생했다. 3·1운동 당시 강화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일경에 쫓겨 충청도 등지를 돌며 도피생활을 했다. 이후 192611월 중국 광동 전동선완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27년에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인천으로 들어와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3016일 인천노동조합 제2차 정기총회에서 조직선전부장에 선임된 그는 이후 인천의 노동조합운동의 중심에 위치했으며, 이로 인해 일경의 관심권내에서 늘 주목을 받는다.

 

 당시 인천은 일본인 중심의 식민도시였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일본인이었으며, 일본군의 군영이 진주해 있어 타 지방과는 달리 무력봉기 등 과격한 항일운동을 펼치기엔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러나 개항지로 외국문물과 선박이 드나드는 항구도시라는 점에서 항만시설과 관련한 부두노동조합, 정미소 관련 노동조합 등 다양한 노동조합을 통한 항일의 움직임은 가능했다. 이로 인해 인천의 항일은 노동운동이 늘 중심에 있었다. 결국 선진학문을 익힌 일부 지식인들은 항일의 방법으로 당시는 신지식이었던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조합과 결합할 수 밖에 없었다. 3·1운동 이후 인천의 항일은 대부분 노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양상을 띠게 되는 배경이다.

 

 권평근 지사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양측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은 이같은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의한 것이다.

 19303월 인천 궁정 가등정미소 하조부 동맹파업이 발생하자 경찰은 파업조종을 주도했던 권 지사를 구속한다. 그러나 노조의 합당한 요구를 정미소측이 전부 수용함으로써 경찰에서 취조를 받던 권 지사는 석방됐다.

 

 이어 그는 1931년 인천청년동맹, 신간회 인천지회 등의 간부로 활동하며 항일의 중심축에 위치한다. 같은 해 6월에는 인천노동조합의 지도를 담당하며, 메이데이와 6·10만세운동 기념시위를 모의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다양한 항일활동을 펼쳤다. 일본 고등계는 늘 권지사의 일거수 일투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마침내 7월 만보산 사건과 관련 인천에서는 방향전환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주도했던 권지사는 일경에 체포, 3년의 옥고를 치른다.

 

 이 사건은 중국 만주에서 발생한 중국인의 조선인 테러사건이 원인이 됐다. 테러소식이 알려지자 인천시민들은 인천의 화교들을 집단 테러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일제의 한·중 이간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권평근 지사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며, 중국인에 대한 테러를 접고 일본에 대한 항일운동에 나설 것을 역설한 것이다. 결국 일주일간의 중국인에 대한 테러는 잦아들었으며, 이후 일본에 대한 인천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진다. 권지사는 치안유지법 위반, 소요죄 등의 죄목으로 체포됐다. 석방 이후 인천의 노동운동에 더욱 헌신하며, 지역민의 권리 옹호와 항일에 전념한다.

 

 권평근 지사의 삶은 그대로 인천의 현대사를 압축해 보여준다. 개항장이라는 지리적 한계성으로 인해 노동운동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인천의 지식인들은 나아가 사회주의적 사상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기반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이후 급격히 배척된다. 해방공간에서 오히려 일본경찰의 총을 맞은 권 지사의 모습은 곧 대한민국 미래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미군정은 일본경찰의 발포와 관련 경찰이 제시한 라인을 넘은 인천인들에 대해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했다며 면죄부를 주었다.

 

 정작 일제치하에서 광복을 꿈꾸며 항일에 나선 권 지사는 해방이 된 시대적 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이미 60년전에 인천의 항일정신으로 추앙받았던 권평근. 그가 이제야 실체를 인정받은 것 또한 의미하는 바 크다. /조태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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