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연극사 저력 이어지기를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1-17 00:50:53
인천연극사 저력 이어지기를
흐르고 싶은 인천- 길에서 묻다 흔적들 19
토월회 창단 후 80여년 … 지역작품 전국연극제 수상 6회
협률사, 축항사, 애관으로 변모해온 인천 연극의 초기 공연장.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유혹이 있다면 여행도 그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다.
지고한 문화를 도시가 감싸고 흐르며 사진엽서 같이 아기자기한 골목을 지나면 가득메우며 나타나는 건축물들의 서성임 그것을 보고 느끼며 걷는 여행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유혹중에서도 중독된 도박이다.
'길에서 길을 묻다.' 조금은 어처구니 없는 말인듯 싶지만 이미 길을 나선 상태에서 발디디며 묻는 길, 길은 가까이 있으며 요원한 것이다.
늘 걷는 길에서도 익숙함을 잊어버리고, 언제 들었나 싶은 지명과 건물의 명칭이 참으로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을 보면, 더욱이 이 다문화 시대에선 가이드 보단 '해설자'의 필요욕구가 진하게 느껴진다.
"협률사가 어디에 있나요?" 하고 길가던 자(者)가 묻는다면, 곧바로 대답할 사람 몇이나 될까. 그래 길은 곧게 뻗어 있지만 길은 물으며 가라고 있는 것이다.
협률사(協律舍)!, 고종조 31년(1894)에 인천의 부호 정치국(丁致國)에 의하여 탄생된 연극장, 축항사(築港舍)로 개칭 했다가 애관으로 바뀐 1915년 전에는 사당(寺黨), 남사당(男寺黨)패가 풍물이나 묘기, 창을 하다가 신연극을 하였던 곳으로 인천연극의 효시랄 수 있다.
인천좌(座)와 가무기좌(歌舞技座)가 1897년에 설립후 8년후 설립되고 그 4년후 다시 표관(瓢館)(현 외환은행)이 생겨 신파극이나 가극 영화를 흥행한 장소로 일본적인 묘기에 불과한 것들로 인천의 연극사에 장을 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라면 설립된 극장(무대)보다도 무대에 올릴 작품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단체, 즉 극단의 창단이 같이하지 못한 세월이라는 것. 비로소 14여년이 지난 1925년이 돼서야 토월회(土月會)를 창단하니, 인천연극의 100년은 걸맞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다. 토월회! 예술적인 정통극을 지향하며 원우전(元雨田) 서일성(徐一星)등 인천인으로 조성된 극단이며 신연극 태동에 극적인 자극을 주며 1년뒤인 1926년 인천의 극작가 진우촌, 함세덕을 필두로 정암, 전우전, 임영균, 고일등을 연기자 내지는 스텝으로 구성된 극단(칠면구락부)을 창단케 한 것이다.
더욱이 고일 작 <눈물의 빛>을 협률사(애관)에서 공연하기에 이르니 토월회와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창단 시기를 인천연극사의 연극다운 효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육혈포강도>란 신파극이 무대(협률사)에 오르긴(1913년) 했어도.
동란을 겪고 위성도시 인천의 노동력 분산, 한국영화의 붐, 그리고 신시대물의 상징 방송극의 거센 물결에 부딪힌 인천연극은 중흥인가 싶더니 말 그대로 암전의 시기가 되었다.
제6회 대통령 수상작 아버지의 침묵(윤조병 작).
경기도 지부에 속해있는 인천연극은 독립된 81년도 이전에는 이렇다할 성과없이 문제의 지부로 논란도 있었지만 뜻있는 몇몇 연극인들의 노고로 재건되며 중앙으로부터 재인준을 받고 79년(연출 양태일) 제1회 대한민국 연극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며 면면을 이어갔다. 이 시기가 인천연극에 세대교체를 이루기 시작한 해로 '경기도신인발굴예술제'로 등장한 박호식이 고군분투하며 박승인과 인천연극을 리드해 갔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했던가. 아깝게도 86년도 연극협회사무장의 직분을 놓고 지병으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유복한 가정의 외동아들, 직물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동인천고등학교 3회 졸업생(47년생)으로 연극에 들기 전, 동인천역사 옥상에 있던 '철도방송'에도 종사하며 자질을 키웠던 그는 연극판이 어렵던 시절, 답동소공원으로 변하기 전 '한진고속버스' 정비소 한 켠을 빌려 연습실로 사용하던 열정을 다 풀지 못하고 갔던 것이다.
80년대 초 인천의 연극은 소극장 운동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했지만 이도 83년에 시작된 전국지방연극제와 시기를 같이하니 그 중흥의 열정은 자에 의함도 많았지만 연극제로 인한 타에 의함이 더 작용된게 아닌가 한다.
1회 '전국지방연극제'(부산)에서 윤조병 작 <도시의 나팔소리>로 문공부장관상 수상을 시작으로 개최된 이 연극제는 왜 지방연극제라고 했을까. 서울은 예술쪽에서도 중앙집권적 누림을 누리고 있는, 웃지도 못할 행태는 누가 고칠까.
금년까지(26회) 개최된 연극제에서 인천연극의 수확이라면 최우수상에 주어지는 훈격의 대통령상은 윤조병 작품으로 2번, 장관상 1회로 인천연극의 진가를 보였으며 극단 십년후가 일궈낸 대통령상 1회, 그리고 타 극단이 일군 장관상 2회의 저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빈다.
인천연극제에서 뽑힌 작품이 대통령상으로 이어지는 인천이 대한민국이며 곧 세계라는 등식을 만들어 낼 저력을…….
/ 김학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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