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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19세기 인천에서의 역사적 사건들

by 형과니 2023. 5. 18.

19세기 인천에서의 역사적 사건들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12-11 12:03:33

 

19세기 인천에서의 역사적 사건들

배성수(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19세기 들어 서양 배들이 한반도 연안에 자주 나타났다. 당시 사람들은 배 모양이 이상하다고 해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러한 이양선의 출몰은 이미 인조 때 시작됐는데 네덜란드의 상인 하멜 일행이 표류하다가 제주에 도착한 일이 있었지만 당시의 사건은 풍랑에 휘말려 표류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19세기 한반도 연근해에 출몰한 이양선들은 제주도, 울릉도 등의 여러 섬을 측량하거나 우리 근해에 접근해 정탐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하기도 하는 등 조선과의 통상 및 침략을 위한 물밑 작업이 목적이었다.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지면서 조선과 서구열강과의 충돌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 병인양요

 

18661월 일어난 병인사옥에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신도 8천여 명이 학살당하자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같은 해 918,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3척의 군함을 조선에 파견했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는 18661013일 인천 앞바다의 작약도에 정박한 뒤, 다음날인 1014일 강화도 갑곶진을 통해 강화도에 상륙했다.

 

강화도는 삼남지방과 양서지방의 조운선이 서울로 향하는 조운수로의 길목에 위치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근거로 해 조선정부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과 보상을 관철시키고 나아가 양국간에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별다른 저항 없이 강화도 갑곶나루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1016일 강화부를 함락시켰다. 강화부 관아와 외규장각 등 국가시설을 장악한 프랑스군은 강화부 외규장각에 소장돼 있던 각종 의궤 등 왕실도서 340권과 은괴 19상자를 전리품으로 약탈했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순무사에 이경하, 순무중 군에 이용희 등을 임명해 전투 지휘부를 구성한 뒤 통진의 문수산성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전투를 대비했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1024일 새벽 정찰대 70여 명을 문수산성으로 파견해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화력에 밀린 조선군이 퇴각하면서 문수산성마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됐다.

 

한편 통진의 덕포나루에 주둔하고 있던 순무 천총 양헌수는 118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프랑스 군 몰래 강을 건너 강화도에 잠입해 정족산성에 주둔했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군은 대령 올리비에에게 병사 150명을 주어 조선군을 섬멸하도록 지시했고, 119일 오전 정족산성 인근에 도착해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주력부대를 동문과 남문에 배치한 뒤에 프랑스군이 가까이 근접하기를 기다리다 프랑스군이 산성 밖 1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공격을 개시했다. 비록 재래식 무기의 성능이 떨어지긴 했지만 조선군의 화력이 집중되자 노출된 지역에 위치했던 프랑스군의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30여 분 만에 150여 명의 병사 중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됐고, 결국 프랑스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족산성 전투는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이 거두었던 유일한 승리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당시 전황은 역전돼 결국 프랑스군의 철병을 가져오게 됐다.

 

# 신미양요

 

미국도 오래 전부터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자 그 동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강경한 외교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의 격침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은 이 사건이 조선을 새로운 교역상대국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강경한 대응 조치를 취하게 된다.

 

 

18715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군 1200여 명이 군함 5척에 나누어 타고 조선 원정에 나섰다. 530일 인천 앞바다 작약도 북쪽에 정박한 미 해군은 한강 수로의 탐사를 이유로 정찰대를 실은 소형 선박을 손돌목 쪽으로 출발시켰고, 광성보를 수비하고 있던 조선과 전투가 발발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도 막대했지만 미국의 포함 모노카시호가 크게 파손됐고, 미국 측은 이에 대한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가 터무니 없다고 판단해 대응하지 않는 한편, 하루 빨리 철병할 것을 요구했다.

 

610일 미국함대는 조선 정부의 적절한 사과가 없었다는 것을 구실로 강화도에 대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같은 날 초지진을 함락시킨 미군은 611일 새벽 덕진진을 점령하고 곧 이어 광성보로 향해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500여 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별였다. 이 전투에서 350명의 조선군은 미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미 해군의 슐레이 소령은 신식병기 한 자루 없이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한 조선군의 용맹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 장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병사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W.S.Schley, ‘기함에서의 45’(1904) 중에서>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게양돼 있던 ()’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그러나 미군으로서는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 앞에 그들의 목표, 목적을 수정해야만 했다. 미군의 예상과 달리 조선 정부의 강경한 자세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군은 72일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군사 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서신을 보내고 다음 날 본국으로 철병하게 됐다.

 

# 운요호 사건

 

앞의 두 사건과는 달리 운요호 사건은 단기간에 일어난 사건이면서 조선의 개항을 가져오게 되는, 사건의 당사자인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공적인 무력행사였다. 18754월 부산과 동해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운요호는 그 해 9월 서해안에 다시 출현해 무력침공을 자행했다. 921일 운요호는 초지진 앞바다에 정박한 뒤 신선한 물을 얻는다는 구실로 보트를 내려 초지진에 무단으로 상륙했다. 초지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응사해 초지진을 파괴했다. 간조 때문에 상륙이 어렵다고 판단한 운요호의 함장은 배를 돌려 남하해 영종진을 포격하고 일시 점령했다. 당시 영종진은 일본군의 포격에 완전히 파괴됐으며, 35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국교를 일거에 타결하고자 했던 일본은 조약 체결을 위해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 원정군 편제까지 갖추어 놓기도 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력한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1876227일 일본 정부와 일명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르는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부산을 포함해 3개 항구의 개항을 결정했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