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물’에서 ‘참물’까지 100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2-19 23: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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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물’에서 ‘참물’까지 100년
인간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의 70여 퍼센트가 물이라는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상식이다. 그렇듯 물은 생명 유지의 원천이어서 저 아득한 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는 굳이 강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왔던 것이다.
글·조우성 시인ㆍ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역사상 인천의 걱정거리였던 물
세계 4대 문명 발상지가 모두 강 유역이요, 오늘날 서울은 한강, 평양은 대동강을 끼고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의 원활한 수급이야말로 나라를 일으켜 권력을 세우고 백성을 먹여 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대한 요건이었다.
예로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정치의 근간으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역사상 인천은 언제나 물의 수급이 고민거리였다. 고구려 주몽의 아들 비류가 미추홀에 이르러 나라 세우기를 꿈꾸었으나 물이 짜 건국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그 같은 인천의 물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경의 물 사정이라면 먹을 물도 마뜩치 않았을 것이니 사람이 모여 나라를 이루기는 더더욱 지난한 일이었을 터였다. 인천의 지형을 살펴보면 금세 그 같은 사정을 알게 된다. 낙동강이나 금강 같은 규모의 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고로 인천의 음용수 공급처는 우물일 수밖에 없었다. 제물포 개항 전후에는 용동 큰우물을 비롯해 웃터골, 화수동, 배다리, 창영동, 송림동 등지에 우물들이 있어 그런대로 식수 확보를 하였으나 조계지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번성해지자 식수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항만 시설의 구축, 경인 철도의 부설 등 근대 교통, 운송 기반의 확충과 우편, 전화 등 새로운 통신 수단의 보급과 맞물리면서 인천은 인적, 물적 집산지로서 급속한 성장을 거듭했고, 그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식수와 산업용수의 안정적 공급은 사회의 중요 문제로 대두되었다.
1889년에 이르러서는 대형 우물 3개소를 파 하루 500톤의 용수를 선박에 공급하게 되었고, 물장수가 늘어나자 물장수조합까지 등장했었다. 그러나 1900년에 1만6천445명이던 것이 1905년에는 2만6천330명으로 급격히 인구가 늘어 보다 근본적인 급수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수도 설치를 처음 논의한 것은 1905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개항장 제물포에서 약 6Km 떨어진 문학산 계곡에 수원지를 만들어 약 1만4천여 명에게 1일 38리터를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는데, 규모가 적고 실용성이 떨어져 무산되었다.
탁지부 수도국에서 측량에 착수
그해 8월 재인 일본인거류민단은 일본 내무성 기사를 초빙해 한강 연안 노량진을 수원지로 하여 인천에 물을 급수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경인 수도 건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듬해인 1906년 2월 구한국 정부는 탁지부에 수도국을 설치하고, 인천의 일본인들이 제안한 경인 수도 건설 계획을 받아들일 것을 결정하고 측량과 설계에 들어가 그해 11월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8년 10월 송현 배수지를 준공한 데 이어 기타 잔여 공사를 하고 1910년 4월 인천의 상수도를 운영, 관리하기 위한 인천수도사무소를 설치했다. 그 해 9월, 마침내 약 4년 여의 공사 끝에 인천에서 노량진에 이르는 인천 상수도 건설 공사를 모두 마무리하였다.
1908년 10월 송현 배수지 준공
정부는 한 달 여간의 시험 통수 기간을 거쳐 10월 30일 역사적인 경인간 통수식을 가졌으며 12월 1일부터는 인천부 각 동네로 수돗물을 공급하기 시작해 상수도 시대를 열었다.
당시 인천 수도의 수원지는 노량진 철교 상류 부근으로 취수탑을 설치하고, 수위에 따라 한강 물을 끌어올리도록 한 것인데. 여기서 정수를 끝낸 물은 직경 20인치가 되는 주철관을 통해 30.8Km가 떨어진 송현 배수지로 보내졌다.
송현 배수지는 인천부 동북쪽 송림산 정상에 있었다. 산 이름은 송림이었지만, 사람들은 이 산을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 불렀다. 수돗물은 이곳을 출발해 그 아래쪽 경인철도를 건너 각국 거류지, 우편국 앞길 등 개항장 부근 시가에 급수되었다.
인천 상수도는 비록 부산, 서울, 평양, 목포에 이어 국내 5번째였지만, 이에 투입된 공사비나 공사 기간 등은 국내 최대의 규모였다. 건설은 탁지부 수도국이 주관했으나 1908년 관제 개편으로 내부 토목국으로 이관되었고,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토목과가 관리하였다.
그러나 그로써 인천의 물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인구의 증가와 각종 군수 공장이 인천, 부평 등지에 들어서자 공업용수의 원활한 공급은 더욱 어려워졌다. 사정이 그쯤에 이르자 가장 고통을 받는 이들은 역시 일반 부민들이었다. 부민들은 연중 물 대란을 혹독하게 겪으면서 고단한 일제 강점기를 보내야 했다.
광복 후에도 인천의 물 사정은 나아진 것이 거의 없었다. 1946년 8월에는 급수를 받지 못한 열차의 운행이 중단 또는 지연되는 사태가 빈발하였고, 12월에는 수도관 파열, 전압 강하 등으로 일주일씩이나 혹한과 물 부족에 시달리기도 했다.
1948년 5월 14일에는 북한이 돌연 남한으로 보내던 전력을 끊어 수돗물 공급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 해에 수돗물이 없던 날은 74일이었고, 물이 공급된다 해도 격일제, 3일제, 주일제 등이 계속되는 형편이었다. 당시 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도원동, 금곡동, 송현동, 내동, 중앙동, 송월동 등에 공동 우물 10곳을 팠지만, 근본적인 대안은 되지 못했다
인천의 물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기 시작한 것은 1956년부터 1965년까지 1, 2차에 걸친 인천상수도 확장 5개년 계획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1970년 말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인구의 증가와 공단 조성, 생활 향상에 따른 물 수요의 급증 등으로 물은 여전히 시정의 최대 당면 과제가 되었다.
그런 정황 속에 1989년, 인천 상수도는 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해에 발족한 인천시상수도본부는 순수한 상수도 사업만을 전담하는 사업본부 체재를 갖춤으로서 공기업으로서 발전하기 위한 기반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그 후 상수도 사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2007년 현재 급수 인구는 169만여 명에서 264만여 명으로, 급수율은 96.5%에서 97.6%로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놓았던 것이다.
물론 원수 가격이 타지에 비해 지나치게 비싼 것 등은 개선해야 할 숙제이나 물의 질 향상과 24시간 공급 체계 등은 괄목상대할 만한 진척인 것이다. 특히 2006년 탄생한 ‘미추홀 참물’은 인천 수돗물의 명품 시대를 알리는 서곡으로서 향후 예상되는 일반 음용수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까지 노리고 있는 야심작이었다.
사실, 사시사철 물 걱정 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다. 공동 수도에서 밤을 지새우며 물통을 채우던 어머니들, 마른 우물 바닥에서 흙탕물을 길어 올리던 누이들, 펌푸 질에 허리가 휘었던 남정네 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새삼 청량한 수돗물의 고마움을 절감하게 된다. ‘짠물’에서 ‘미추홀 참물’까지 온 물의 역사는 곧 인천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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