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사랑은 인천의 찐~한 지역정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2-19 23:17:37
야구사랑은 인천의 찐~한 지역정서
우리나라에 야구가 들어온 것은 개항장이었던 인천을 통해서였다. 철도, 우편, 전화, 등대, 기상관측 제도가 국내 최초로 도입되었을 무렵 축구와 함께 야구도 들어왔다. 스포츠 ‘베이스 볼’도 개화 문물의 하나였던 것이다.
글·조우성 시인ㆍ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영어야학교 생도들 처음 시합해
과거의 통설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의 총무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가르친 것이 효시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인천 지역사를 알지 못한 데 따른 오류이다. 아직도 역사를 왕실이 있던 ‘서울’ 위주로 기술한 잘못된 예의 하나라 하겠다. 양탕국(洋湯국·커피)의 도입을 서울의 손탁 호텔로, 철도 시발지를 노량진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역사적 실체에 다가서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개성교 학생들이 일본 야구 도입기에 그랬듯, 인천고(仁川高)의 전신인 인천영어야학교 생도들 역시 역사적 중계자로서의 역할을 해 냈던 것이다. ‘인천고100년사’는 영어야학교 1학년생의 1899년 2월 3일자 일기를 소개하고 있다.
‘3시 근무가 끝난 다음 4시경부터 중상(中上) 군을 불러내어 일연종(一蓮宗·옛 신흥초등학교 옆의 절) 앞 광장에서<중략> 함께 ‘베이스 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하고 5시경에 돌아와 목욕탕에 갔다.’
비록 14~5세 된 일본인 학생의 일기이나 이것이 ‘국내 최초의 야구(野球) 기록’인 것이다.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일기장의 기록은 인천 제물포가 야구의 도입지이며, 이미 인천에서는 야구가 일반화된 운동 경기였음을 말해 주고 있는 단서인 것이다.
그로부터 출발한 야구의 열기가 결집돼 첫 팀을 창단한 것은 1915년경이었다. 그 해 10월 31일 인천상업 팀은 이미 철도구락부 주최 경룡추계야구대회에 참가했고, 그 후 인우구락부, 실업구락부, 미신구락부 등이 등장해 ‘웃터골’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인천 야구의 싹을 키워갔다
1919년에는 경인기차통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이 한용단(漢勇團)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인천 한인 최초의 야구팀이었다.
한용단은 인천 부민의 희망이요, 우상이었고, 야구사랑은 그 무렵부터 인천의 지역 정서로 자리 잡아 나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22년 5월 인천체육회 야구부가 주최한 전인천우승기쟁탈전에는 한용단, 기봉단, 상우단 등 조선인 팀을 비롯해 10개 팀이 참가하는 등 일대 붐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4년 이들이 활동하던 웃터골 공설운동장 부지에 인천부립중학교(仁中)가 세워지게 되자 야구장은 도산정(桃山町·지금의 숭의동)으로 이전해 갔다.
인천 야구 전성기 구가한 숭의구장
이 운동장에서 실력을 연마해 인천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인천상업 야구팀이었다. 비록 일본인 위주의 팀이었지만, 이기영, 이호직, 김영택 같은 선수들이 크게 활약하였고, 김선웅, 장영식 선수는 조선 대표로 일본 갑자원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야구를 영미귀축(英美鬼畜)의 운동이라며 중지시켰고, 심지어는 식량을 증산한다며 소화고녀(昭和高女·지금의 박문여고) 학생들을 동원시켜 야구장에 콩과 고구마를 심는 등 광기를 부리다가 물러났다.
야구 경기를 재개한 것은 광복 후인 1945년 9월 중순이었다. 우선 콩밭을 야구장으로 환원시키는 한편 체육인 정용복 선생의 주선으로 미 공병대와 보수작업을 했고, 운동장 최씨가 마지막으로 번듯한 백색 라인을 그어 야구장을 우리 품으로 돌아오게 했다.
인천 주둔 미군과 급조한 전 인천군과의 대결이 첫 경기였는데 그를 계기로 미 항만사령부와 에스컴사령부는 볼, 배트, 클럽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등 인천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인천고와 동산고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야구대회인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대회 등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년간 전국을 제패해 인천 시민들을 열광케 했다. 인천 시민들은 야구사랑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토양 아래서 2004년 5월 인천고가 야구부 창단 100년 만에 중앙일보 주최 제38회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해 대통령기를 차지한 것은 인천 야구의 부활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세계를 제패해 인천 이름 빛낸 야구
인천고는 이어 2005년 4월에 열린 한국야구100주년 기념 우수고교초청 야구대회에서도 우승함으로써 다시한번 인천이 야구의 도입지이자 그 전통을 이어온 본고장임을 과시하였고, 동산고와 제물포고 역시 각종 전국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 왔다.
프로 야구도 약진을 거듭했다. 현대 유니콘스의 탈인천(脫仁川)으로 크게 실망했던 야구팬들이 후발 ‘SK 와이번스’의 노력을 높이 사 우리 팀으로 받아들였다. SK는 삼미 이후 그 어느 팀보다 눈부신 활약으로써 보답해 인천야구의 맥을 지키고 있다. 올 정규 리그에서도 우승해 2연패를 기록했다.
특히 금년 북경올림픽대회 야구 부문의 우승은 실질적으로 인천 야구의 승리여서 시민들의 가슴을 더욱 벅차게 하였다. 세계 야구계를 놀라게 한 투수 류현진 선수는 창영초등학교, 동산중, 동산고에서 자란 우리의 아들이요, 김광현 선수를 비롯한 주전의 상당수가 SK 현역 선수라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인천 사람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해 온 인천 야구의 보금자리인 숭의야구장이 도시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지난달 5일 남구청장기 쟁탈 초·중등부야구대회를 끝으로 땀과 눈물, 좌절과 환희로 점철된 전광판은 더 이상 불을 켜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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