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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건국 60년, 되돌아본 인천의 발자취

by 형과니 2023. 5. 18.

건국 60, 되돌아본 인천의 발자취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2-19 23:21:32

 

건국 60, 되돌아본 인천의 발자취

 

광복(光復), ‘조선 독립 만세!’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인 이육사 선생이 쓴 절창(絶唱) 시에 광야(曠野)’가 있다.

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광복은 광야에서처럼 천고 뒤가 아니라, 선생이 독립운동 혐의로 서울에서 붙잡혀 북경 감옥으로 압송돼 옥사한 다음 해인 1945815일 갑자기 이 땅에 찾아왔다.

 

그럴밖에 없었다. 일제는 조선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아 승전보만을 전했고, 인천을 비롯한 각지에서는 심야에 횃불을 켜든 채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시가행진 같은 단말마의 광기를 벌이고 있었다.

 

1945, ‘오키나와가 함락되자 일제가 패전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눈치 채고 있었지만, 스스로 항복하리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선대들의 한결같은 증언이었다.

 

인천에서의 광복도 그렇게 왔다. 194581512, 라디오에서는 일왕의 담화가 흘러나왔지만, 소리가 불분명해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역사의 진상은 서서히 밝혀져 갔다.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 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언제 준비하였는지 조선독립만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방의 기쁨과 흥분의 열기가 아직 가라않기도 전에 또다시 비극은 시작되고, 자주와 독립이란 것이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불가피한 결과에 불과했던 것이었으리라나 역시 다른 인천시민들과 똑같이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만 믿고 매일 답동성당의 종각에 올라가 팔미도 앞바다만 바라보며 태극기를 흔들어 댈 뿐이었다.’(임명방·‘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기억황해문화 1994년 겨울호)

 

미군정(美軍政)과 정부 수립

 

그해 98일 인천에 미군이 진주했다. 그들에 의해 군정이 실시되자, 일인과 한인 간의 일촉즉발의 상황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며칠 뒤 군정관(軍政官)에 스틸맨이 임명되었다. 107일 국문 신문 대중일보를 창간하였고, 1016일 창영국민학교에서는 최초로 민주적 방식의 선거에 의해 임홍재 씨를 초대 시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111일 인천경찰서장 김윤복 씨와 법원 인천지청장 방준경 씨가 일본인으로부터 사무 인계를 받았고, 시의원 32명을 새로 임명하였다.

 

1223일에는 76개의 행정 구역 단위인 정명(町名)’동명(洞名)’으로 바꾸어 발표하는 등 나라를 세우기 위한 사전 작업을 숨 가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좌익과 우익은 찬반의 대결 국면으로 빠져 들고, 사회의 혼란은 극에 달하였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1년 후인 194752차 회의가 속개됐으나 역시 타결이 안 되자 한국의 독립 문제는 국제연합(UN)에 상정되었다.

 

그해 UN 총회는 UN 감시 하의 총선거 실시, 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 철수, 유엔한국위원단 설치안을 통과시켰고, 1948년 유엔 소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독립 정부 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로써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는 끝내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1948510, 인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역사적인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531일 국회가 개회되었으며 국회는 곧 헌법 제정에 착수해 717일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을 공포하였다.

 

815, 마침내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날 인천공설운동장에서는 26여만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표양문 시장의 식사, 곽상훈 의원의 독립 약사 보고, 각 애국단체의 메시지 낭독과 만세 삼창 등으로 정부 수립을 축하하였고, 식이 끝나자 시민들은 농악대와 가장행렬을 앞세워 흥겹게 온 시가를 누볐다.

 

6·25전쟁과 인구의 재편

 

그러나 그토록 열망했던 독립한 내 나라를 세웠다는 가슴 벅찬 기쁨은 채 2년이 가지 않았다. 지역 사회는 뒤숭숭하였다. 인천시 공무원 19명의 남로당 푸락치 사건, 대동청년단 동구지단 수류탄 투척, 좌익 흑죽야산대(黑竹野山隊) 적발, 남로당 인천시당책 검거 등 비상한 시국이 이어지더니 결국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이어졌다.

 

이 동족상잔의 625는 민주ㆍ공산 양대 진영의 대리전적 성격과 함께 내쟁적(內爭的) 요소를 동시에 지닌 전쟁으로 개전 9일 만인 73일 밤 11시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인천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후, 피아간의 참상은 필설로는 형용키 어려운 참절비절 그 자체였다. 해광사에 설치된 정치보위부를 정점으로 한 적 치하의 3개월, 포탄이 뜨거운 우박처럼 월미도와 시가지를 강타했던 인천상륙작전, 엄동설한 속에 피란길에 나섰던 1·4후퇴, 2차 인천상륙과 재수복, 부평 지역 반공포로 석방과 휴전에 이르는 과정은 아비규환적 참상이었다.

 

수복이 되자 피란 갔던 시민들은 속속 귀환하였다. 그들은 주택을 비롯한 공공기관, 산업 시설 등이 모두 파괴된 실상에 망연자실하였다. 그와 함께 공산 정권을 피해 월남한 동포들이 대거 이주해 오기 시작한 것도 커다란 사회 문제였다. 당장 그들의 구호 문제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1953년도 인천의 총인구 256751명 중 피란민은 75376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향후 인천의 도시적 성격을 형성해 나가는 데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적인 인구의 유임은 있었지만, 이처럼 일시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인천은 말 그대로 인천합중시(仁川合衆市)’로서 서서히 변모해 갔다. 제 꿈을 펼치고자 인천으로 이주해 온 이들은 누구나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어 전후 건설 사업에 동참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인천에서만은 지방색(地方色)을 따지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벌써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인천을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전재(戰災) 복구와 공업화

 

전쟁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막대한 인명 살상은 물론 주택, 학교, 관공서, 금융기관, 의료, 수산 시설 등의 피해와 함께 강철, 방적, 도자기, 유지공업 같은 산업 시설의 피해도 심각했다.

 

전후의 재건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각급 기관. 시민이 모두 나섰지만, 그 중 한미친선위원회의 활동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도로 보수, 교통정리, 교량건설, 각급 학교 신축 및 증축, 하수구 개량, 주택 건설을 비롯한 1954년도의 공설운동장 보수 공사 등은 기억에 남는 전재(戰災) 복구 사업이었다.

 

파괴된 공장의 복구도 착착 진행되었다. 대한중공업(송현동)을 비롯한 한국강업(송현동), 조선철강(학익동), 대동철강(만석동), 인천신철 등은 전국적인 제강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고, 한영알미늄(숭의동) 등 군소 60여개의 공장이 들어서서 식기, 알미늄 판 등을 생산해 냈다.

 

한국판유리공장(유리), 애경유지공업(비누), 대한성냥공업사(성냥), 중앙도자기공업(요업), 인천고무공업사(고무), 이천전기(전압기), 조선기계제작소(조선), 동양방적·흥한방적(섬유), 대한제분·삼화제분(제분), 고려·삼화정미소(정미업), 인천주정·와룡주정(양조), 경인합동음료(사이다) 등도 생산을 재개하였다.

 

경제 발전기와 인천 부상

 

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력은 4·195·16을 불러 왔다. 혁명 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인천 경제의 비약적인 발돋움을 하게 한 토양이 되었다. 경인고속도로 개통, 경인선 복선 시설, 인천항 제2(Dock) 축조, 인천기계공단, 인천비철금속공단, 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 등과 인천은행(경기은행 전신) 설립 등은 눈부신 발전의 모습이었다.

 

1962년 이후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은 고도성장을 앞당겨 실현케 하였다. 이 시기의 노력들은 오늘날의 중화학공업시대를 열게 하였고, 우리가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부상케 한 직접적 동인이었다. 인천항을 수출 전진 기지로 만들기 위한 전면 ’(Dock)화와 전철 개통 등은 지역 경제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특히 198171일의 직할시 승격은 도시적 변모를 크게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되었다. 시는 지역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청사를 남동구 구월동으로 이전하였고, 그와 동시에 21세기를 대비한 항구적인 인천의 발전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비전의 핵심은 인천을 동북아의 중핵 도시로 키워 나가자는 것이었다. 신도시 건설은 땅을 재생산할 수 있는 인천의 천혜적 이점을 살린 사상 초유의 대역사(大役事)였고, 국제적 환경 변화와 인천항의 항계 확장 등은 물류의 거점으로서 인천항을 거듭 태어나게 했으며, 아시아의 허브를 목표로 건설한 인천국제공항은 우주 항공 시대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세계를 향해 하늘의 문을 연 진정한 개항(開港)’이었던 것이다.

 

 

21세기, 동북아의 허브 도시로의 비상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적 포용성은 건국 이래 인천이 지녀온 독특한 정체성이요, 그를 바탕으로 한 역동성은 오늘과 같이 인천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한 원동력이었다.

 

신미·병인양요, 운양호사건, 제물포해전, 인천상륙작전 등 불행한 전쟁터로 세계에 알려졌던 것이 지나간 역사였다면, 그 가시밭길 속을 헤쳐나와 세계가 괄목상대하는 명품도시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오늘의 역사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필 리 없다.’던 코리아요, 역사의 전환기마다 전쟁의 참화로 피눈물 나는 비극을 겪어온 인천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지역 사회적 성취를 우리들은 마침내 이루어 낸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의 불협화음은 반드시 풀어가야 할 시대적 과제이지만, 우리 고장 인천이 건국 60년 만에 육해공(陸海空)에서 천지개벽할 대기운(大機運)을 맞이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모두 합심해 이 천운의 기회를 살려 풍성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후손들에게 기필코 물려주도록 노력을 다해야겠다. 이것이 건국 60년을 맞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