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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인천은 한국 이민의 출발지이자 본향(本鄕)

by 형과니 2023. 5. 18.

인천은 한국 이민의 출발지이자 본향(本鄕)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2-22 13:39:22

 

인천은 한국 이민의 출발지이자 본향(本鄕)

 

19021222일 화요일, 인천 제물포항. 내리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이민 제1121명은 쌀쌀한 바닷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기선 현해환(玄海丸ㆍ켄카이마루)에 몸을 실었다. 일본 큐슈(九州) 나가사키(長崎) 항에서 하와이로 떠나는 미 태평양 횡단 기선 개릭 호(S.S. Gaelic)’에 승선하기 위해서였다.

 

·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항해에 오른 그들 가슴 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헐벗은 연안(沿岸)의 풍광 같은 백성들의 모습과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국내 정세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민원(총재 민영환·이민 사무를 맡아보던 정부 기관)이 각지에 내붙였던 방()의 내용을 수없이 되새겨 보고 있었다.

 

기후는 온화하여 심한 더위가 없음으로 각인(各人)의 기질에 합당하며 월급은 미국 돈으로 15,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은 휴식함. 농부의 유숙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주가 지급하고, 농부에게는 받지 아니함.’

 

말 그대로라면, 당시로서는 이민 조건이 그리 나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뜻 이민에 응할 수 없었다. 일찍이 접해 본 적이 없는 양인(洋人)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돌아올 기약도 없이 부모 곁을 훌쩍 떠나버린다는 것 자체가 그 시절의 윤리적 관념에서는 불효와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황인지라 전국 대도시와 항구에 이민 광고 등을 게시했어도 희망자는 거의 없었다. 다급해진 사업 대행자 데쉴러(D.D. Deshler)는 내리교회의 존스(George Heber Jones·趙元時) 목사에게 도움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존스 목사는 애초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의회의 이민 주선 요청을 받은 주한 미 공사 알렌의 친구여서 데쉴러(D.D. Deshler)의 청을 외면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50명 이상의 내리교회 신도와 20여 명의 인천항 부두 노동자를 설득했고, 그렇게 해서 모인 이민단 수는 121명에 달했다.

 

출신지별로 보면, 제물포 67, 부평 10, 강화 9, 서울 7, 경기도 3명 등으로 오늘날의 인천광역시 지역이 86명으로 압도적이었다. 이는 이민 사업이 여러모로 인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며, 실제로 내리교회의 핵심 간부들은 이민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통역은 물론 후에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2일간의 항해 끝에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1차 신체검사를 받은 후 104(통역관2명 포함)만이 갤릭 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3주 만인 19031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 항 외곽 샌드 아일랜드에 도착하였다.

 

이민국은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해 안질 등을 앓고 있던 15명을 탈락시켜 제물포로 되돌아가게 하고, 남자 48, 여자 16, 어린이 22명 등 86명만을 받아들였다. 그날 오후 86명의 이민 제1진은 협궤 열차편으로 오하우 섬 북쭉 해변가 와이아루아 농장 무쿠레이아 캠프에 짐을 풀었다.

 

고국 제물포항을 떠난 지 22일 만의 일이었다. 물론 초기의 농장 생활은 이민 회사의 공고문과는 달리 힘겨운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기거했던 곳은 말이 농막(農幕)이었지 실은 판자로 만든 군대 막사와 다름없는 곳이었고, 숨이 턱턱 막히는 사탕수수밭에서는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루나라고 불리던 독일인 감독들의 횡포는 모욕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런 고충 속에서도 그들은 하루치의 임금 125센트를 큰돈으로 알고 꼬박꼬박 저축하거나 고국으로 송금하면서 망향의 애틋한 심사를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노총각들이라 개중에는 술과 노름에 빠지는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것이 가정을 갖지 못한 데 따른 현상이라고 판단한 하와이 이민국은 그들의 결혼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행한 것이 사진 혼인법이었다. 그에 따라 세칭사진 신부(픽춰 브라이드)’들의 입국이 허락되었고, 그들에게는 영주권이 주어졌다. 최초의 사진 신부는 19101128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최사라 양으로 그녀는 이내수 씨의 부인되었다. 192410월까지 951명의 사진신부들이 당도하면서 한인 사회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 무렵, 우려했던 것처럼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그러자 이민 1세대들은 분연히 일어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이는 한국 이민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한 대목이다. 비록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 박용만 장군의 지도 노선이 달라 일부 분열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하와이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이 크게 발흥되었고,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공채 증서를 발행하는 등 그 열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광복이 되자 하와이 이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동참해 인천에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2세들을 교육시키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거액을 쾌척하였고, 대학의 이름도 인천하와이'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따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이라 해 인천과 하와이 동포 간의 혈연적 관계를 잊지 않도록 했다.

 

그 후, 20031, 200만 미주 한인 사회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펼쳤다. 당시 동포들은 인천 지역사회 인사들과 안상수 시장을 대대적으로 초청해 다시한번 인천이 이민의 출발지요, 고향임을 내외에 깊이 각인시켰다.

 

귀국 후, 안 시장은 한 세기 전 이민을 결행한 선대 인천인들이야말로 인천의 개척자적 정신을 실천, 발양한 분들이요, 역경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크게 헌신했던 것은 곧 인천의 긍지이며, 그 같은 정신을 길이 후손에 전하는 동시에 이민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한국이민사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해 마침내 개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