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미도 등대
인천의관광/인천의섬
2008-12-22 13:37:51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바닷길 처음 밝혀
‘내 귀는 소라 껍질/ 푸른 바다 물결소리를 그리워한다’는 프랑스 시인 쟝 꼭또의 시 ‘소라껍질’이고,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것은 역시 프랑스 시인 장 그르니에의 시 ‘섬’의 전문이다. 두 편 다 유명한 바다의 시다.
글·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팔미도 등대. 광달 거리 2마일, 매 30초에 1회 취명한다.
위 시들은 촌철살인의 표현법으로 한쪽은 바다 그 자체를 열망하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은 바다에 떠 있는 섬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와 섬의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지만, 그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 섬에 들자면 누구나 길잡이 등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섬에는 등대가 있게 마련이고, 등대에는 등대지기가 있어 바다를 건너고, 섬을 찾으려는 이들을 위하여 춘하추동 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등대가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것은 1903년 6월이었다. 1883년 개항 직후부터 우리 정부는 제물포항에 등대를 설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를 건립할 만한 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차였다.
그러나 침탈 야욕에 눈이 어두웠던 일본은 저들의 필요에 의해 1901년 체결한 ‘통상장정(通商章程)’에 ‘통상 이후 한국 정부는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礁標)룰 설치한다.’고 한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계속 강권하고 있었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정부는 그에 못 이겨 1902년 인천 제물포에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의 건설에 착수해 그 이듬해 각각 그를 완공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등대의 효시다. 물론 일본의 강압이 아니었더라도 그 언젠가는 보란 듯이 세웠을 것은 불문가지이나 결과적으로 이 등대는 일본의 압력에 밀려 세워진 것이 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의 근대가 일본에 의해 굴절되어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팔미도 등대는 본의가 아니게 이 나라, 이 땅을 무시로 드나들며 휘저었던 열강의 이양선과 군함의 이정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말하자면 굴욕적인 근대사를 낮이나 밤이나 온몸으로 버티어낸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 했던가? 팔미도 등대가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구원의 불빛으로 살아난 것이다. 등대로서는 천재일우와 같은 명예 회복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 나라, 이 강토가 백척간두에 섰던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였다.
낙동강 교두보를 두고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전황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일루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극심한 간만의 차 등 여러 조건으로 성공 확률이 없다던 이 운명적인 작전에서 팔미도 등대는 막중한 역할을 짊어지고 있었다.
미 클라크 대위와 한국인 캘로부대 요원들은 맥아더사령부의 지휘에 따라 1950년 9월 10일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에 올라가 등대를 조사했다. 웬일인지 북한군은 그동안 등대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클라크 대위가 조사해 보니 프랑스 제 회전반사경의 전지 줄만이 끊어져 있을 뿐 멀쩡했다.
그가 도쿄사령부에 “필요하다면 팔미도 등대를 켜 놓겠다.”고 보고하자, “9월 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들은 9월 14일 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팔미도에 잠입해 등대의 불을 밝혔다.
벌써 수백 척의 함정들이 팔미도 등대를 길잡이 삼아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에는 일대 장관을 이루며 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때 인천의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적 함대가 인천에 접근중임. 적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 확실해졌음. 전 부대에 전투 준비를 명령했음…”이라는 긴급 전문을 평양 최고사령부에 보내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렇게 시작하여 피아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2003년, 팔미도 등대는 건립 100주년을 맞았다.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이를 기념해 팔미도에 최첨단의 기념 등대와 조형물을 설치했고, 우정사업본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한 세기만에 최첨단 등대를 세웠으니 격세지감의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최근 팔미도와 그 정상에 위치한 등대가 관광자원으로 공개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천항에서 13.5Km 남쪽 해상에 외로이 떠 있는 섬. 두 개의 섬이 여덟 팔(八) 자처럼 뻗어 내린 것이 마치 꼬리와 같다고 해서 팔미(八尾)라 불렸던 섬.
옛 인천의 선대들이 ‘석양에 섬을 돌아드는 돛단배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한 나머지 그 풍광을 ‘팔미귀선(八尾歸船)’이라 하여 ‘인천 팔경(仁川八景)’의 하나로 꼽았다는 해상 경승지가 바로 팔미도인 것이다.
바야흐로 7월이다. 바다, 섬, 소라껍질, 등대- 그 낭만의 언어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시원스레 발목을 적시는 듯하다. 저 팔미도 솔바람소리 속에 우뚝이 서 있는 등대를 찾아가 대자연과 지역사를 가족과 함께 음미해 보는 것도 이 여름의 이색적 피서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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