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평화지대를 가다-(22) 백령도 <2>
2008-11-22 22:22:15
속살 드러낸 채 신음하는 절경
서해 평화지대를 가다-(22) 백령도 <2>
‘어이할꼬!’
신이 빚어냈다는 백령의 비경(秘境) 저편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탄식이다. 보듬고 가꾸었으면 그 농익은 절경들에 눈이 부셨을 법도 하건만… 문드러지고, 깨지고, 썩어가는 보석들을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움에 저절로 나오는 한숨이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절묘한 백령의 선경(仙境)은 성한 데가 없을 지경이다. 청자빛 바닷물이 날라다 준 규사를 머금어 비행기도 내려 앉았다는 해변은 묵사발인양 물러있다. 시뻘건 속살로도 감당 못한 백령의 산은 그 약연의 업(業)을 이웃한 대청도로 넘겨주고 있다. 마시자고 만든 식수 저수지는 오물이 흘러드는 댐에 갇히는 바람에 검은 빛깔의 이끼가 도는 허드렛물만 담고 있다.
길이 2㎞, 폭 400여 m에 이르는 사곶해변. 관광객 45명을 태운 버스가 모래사장을 거침없이 달린다. 여느 해변같으면 관광객들이 모두 내려 모래펄에 빠진 버스를 밀고 당기느라 진땀을 뻘뻘 흘릴 법도 하지만 아직까지 사곶해변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 광경이다.
허나 사곶해변에 버스는 커녕 승합차조차 들어가지 못할 날도 멀지 않았다. 사곶해변과 맞닿아 있는 방조제 근처. 어른 한 사람조차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해변은 물러 있었다. 발을 내딪는 순간 늪 인양 발목까지 푹 꺼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군용 비행기가 내려 앉았다는 사곶천연비행장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천연비행장으로 막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곶해변의 운명은 진촌의 미완공 간척사업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농촌공사는 498억 원을 들여 1991년부터 길이 820m의 방조제를 쌓고 공유수면 645㏊에 대해 간척사업을 벌였다. 이곳에 벼 농사를 지어 대청도과 연평도 등 서해 5도의 쌀 모두 댈 요량이었다. 간척지 325㏊와 담수호 131㏊, 배후지 188㏊를 조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농업용수로 담수호의 염분농도가 워낙 높아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처지다. 1999년 완공한 담수호(담수용량 250만t)의 염도는 ℓ당 1만2천∼1만5천㎎으로 측정됐다. 농작물이 자랄 수 있는 염도(ℓ당 1천∼1천500㎎)보다 최고 15배 가량 높은 수치다. 이 바람에 대형관정 15개를 포함해 지하관정 37개를 뚫었다. 백령도의 연간 강수량이 600~700㎜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천시 옹진군은 진촌간척지에 벼농사가 쉽지 않자 밭농사 중심으로 농작물 재배실험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른 천연비행장도 골칫거리다. 옹진군은 군부대와 사곶해변을 천연비행장으로 활용할 수 없을 경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마련해 주기로 합의했다. 지금은 ‘비행기가 내려앉을 수 있다, 없다’ 옥신각신하며 2006년부터 농촌공사와 군부대가 1년씩 번갈아가며 5년 동안 천연비행장의 토질을 조사해 오고 있는 형편이다.
땅도 병들어 가고 있다. 용기포 신항 건설을 위해 백령면 진촌리 산 48 부지 야산이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2004년 인천지방해양항만청이 동·서 방파제 380m와 호안 180m, 카페리·화물선 부두 길이 180m를 건설하기 위해 토석이 필요하자 백령도 야산을 파헤쳤다. 그러나 채석장으로 허가 난 야산에서 원하는 양(20만2천222㎥)만큼 나오지 않았다. 국토해양부와 인천지방해양항만청, 국방부 등이 돌 품질에 대한 추가 지질조사를 무시한 채 캐고 보자는 식이었다. 기초사석 11만7천㎥와 피복석 1만3천700㎥ 등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애써 공사한 방파제 등의 사석이 태풍과 파도로 3만5천478㎥나 쓸려 나갔다.
정처 없이 미뤄지는 용기포항 건설을 내버려 둘 수 없자 옹진군은 대청리 산 143의 2일대 1만8천302㎡(채석량 15만9천900㎥)를 다시 허물기 시작했다.
물은 어떠한가. 2004년 인천시상수도사업본부는 연화2리 계곡 130m를 콘크리트 댐으로 막고 취정수장과 관로를 설치해 주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검사 결과 4~5급 수질로 떨어져 몇 년 동안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사업본부는 지난 5월 고도정수처리시설(생물여과장치)을 현장에 설치·가동해 식수원 댐 물의 화학적산소요구량(COD)을 ㎥당 0.5㎎으로 떨어뜨려 수돗물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내년 2월부터 백령도에 수돗물로 공급할 예정이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백령 식수원 댐 물은 성상 자체가 먹을 수 있는 한강 원수와 다르다고 입을 모은다. 식수원 댐은 상류에 고구마 밭 등 경작지가 자리 잡고 있어 비료나 퇴비가 빗물에 씻겨 수질이 나빠졌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강수량이 적은 백령의 지리적 특성상 오염원과 함께 유입된 물이 오랫동안 댐 안에 갇혀 있는 탓에 수질이 급격히 떨어져 고른 수질관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기값 이외에 원수값이 별도로 들지 않은 지하수를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해도 한 달 수도료가 5천원에 불과했던 주민들이 생물여과 과정을 거치는 바람에 값이 비싼 수돗물을 선뜻 받아들일 지는 미지수다.
북녘을 향한 백령도 앞바다 먼발치에는 심청전의 배경이 된 인당수가 있다. 위치는 정확히 꼬집지 못하지만 북한 몽금포 앞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백령도엔 심청이와 얽힌 지명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연화리 역시 심청이와 연관된 곳이다. 조선시대 이대기가 지은 ‘백령도지’에 따르면 백령도 연화동논 뜰에 서해신이 머무르는 신지라는 연못이 있었다. 심청이 연꽃에서 나왔다는 이 연못은 1600년대 둘레가 5~6리고 주위에는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을 가렸고 여러 학들의 서식처였다고 말하고 있다.
백령도는 심청이와 연관되는 진촌 북쪽 해발 100m 높이의 산에 심청각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심청이가 연꽃에서 나온 연화리엔 연꽃은 커녕, 연못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동네에서 60여년 이상 지낸 노인들도 연꽃 얘기엔 고개를 갸우뚱한다. 글=박정환·조자영기자 hi21@i-today.co.kr 사진=안영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