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관(淸館)언덕길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1-15 23:10:55
‘전족’ 여인과 매캐한 異邦<이방>의 기억
(2) 청관(淸館)언덕길
1980년대 초인가. 길 풍경이 여전히 낡은 채 그대로다. 유년시절, 어머니께서 절대로 공원을 넘어 그곳까지 가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시던 그 때 그 분위기가 얼마간 남아 풍긴다. 여러 가지 별난 이야기가 들리던 그 무렵의 청관은 늘 으스스하고 괴기스러운 느낌뿐이었다. 중학생이 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을 좀 놓고 가 볼 수 있었지만, 6·25 후의 피폐와 거리 전체의 퇴락이 스산함을 더했다.
(1982년 청관.)
이 거리에서 그 특이한 청국 남자들의 변발을 본 기억은 없다. 그러나 “걸을 때면 뒤뚱거리는 졸여 붙인 전족(纏足)”의 여인들은 원형의 그 큰 귀고리와 함께 흔히 보았다. 당시의 인상이라면 청관의 하늘은 늘 무겁게 내려앉은 듯이 침울했고, 적막한 이방(異邦)의 공기가 아편 연기처럼 매캐하게 코를 찔렀다는 기억밖에 없다.
그것이 정말 아편 담배였을까. 사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정희(吳貞姬)의 소설 ‘중국인 거리’는 “아편을 피우고 있는 거야, 더러운 아편장이들”이라고 대통담배를 피우던 중국인들을 더 심상치 않게,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진 속의 언덕길은 왼쪽의 2층집, 즉 현재의 대창반점(大昌飯店)에서 화교 학교인 중산학교(中山學校) 정문 방향으로 오르는 길이다. 아마 이런 설명이 없다면, 여기가 만주(滿洲) 어디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1959년 전창근(全昌根)이 감독 겸 주인공으로 분(扮)한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은 여기 청관이 주요 배경이었다. 어쩌면 오른쪽 두 번째 집이 영화 속 안 의사가 들어서던 하얼빈의 한 객사였는지 모르겠다.
“남녀 간에 칙칙하고 더러운 검정색이 아니면 청색 무명옷을 입고 있었으니 깔볼 만한 몰골이기도 했다. 게다가 싼 품값을 아껴가며 지내는 빈곤하고 불결한 살림” 때문에, 사진 속의 얼어붙은 포도(鋪道)처럼 차갑고 음울하고 부정적이고 낡아빠졌던 청관 거리. 그러나 지금은 이름조차도 한자 청관이 아닌 영어 차이나타운이다. 게다가 인천의 대단한 특색지대로, 별난 명소로 살아나서 활기를 띠고 있다.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인천의 옛 모습 속에서 그래도 견뎌 남아 다시 은성한 시절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나마 반갑다.
새삼 인천의 옛날이 가슴 속에 살아난다. 반세기 전, 미술반 친구들과 주일이면 이 언덕을 넘어와 이젤을 펴던 그 시절을 누가 기억하랴, 이 땅 나의 인천아. 글=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사진=김보섭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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