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억의 마이산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09-01-30 11:35:26
인천이 담긴 詩 ④
‘어느 절세의 풍경화가가 여기를 다녀갔던가’
- 한상억의 마이산
글·김학균 시인
1987년의 9월, 가을을 알리는 옷깃바람이 사뭇 차갑게 느껴지는 신포동의 저녁은 그래도 활기찬 모습으로 기억된다. 중국 요리집 진흥각,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한상억 선생의 송별회장이다. 인천의 문인들이 만장하리라던 기대는 사라지고 30여명, 좀 쓸쓸하다할 분위기에 속에서 진행된 석별의 장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문인(문단)들 중 제일 막내였던 필자는 초입에서 안내를 하며 참석한 사람들의 방명을 받고 있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책으로 된 방명록이 아니고 화판(일본명으로 스키시판으로 동양화 재료)에 필적을 남겨 떠나실 때 드리기로 했던 것이다. 허나 송별회가 끝났으나 무슨 연유로 그때 드리지 못하고 훗날 미국으로 우편 송부했던 기억이 후회스럽다.
왜 이민을 가셔야 했는지 뚜렷한 사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외아들(충희)이 금성사 미국지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중 그냥 눌러앉아 모셔간 것이 첫 손가락을 꼽는 이유라면 이유인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나신지 만 5년. 고국방문길 1개월 뒤 심장병으로 LA에서 77세의 일기로 영면, 인천인으로서 애정의 보따리를 다 풀어 놓지도 못한 채 가신 것이다. 시인 한상억의 발자취 속으로 찬찬이 걸어가 보자.
해방은 이 땅에 새로운 것을 많이 흡입하며 영원한 자유와 한동안 잃어버렸던 모국어를 되찾아 주었다. 복간된 신문과 창간되는 잡지 등이 헤어져 있던 문인들을 불러 모으며 신문학의 싹을 틔웠다 할 것이다. 36년 동안 갖지 못했던 문인들의 모임도 결성되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활동 없이 휴면기에 있던 인천도 해방직후 「신예술가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뒤를 이어 「인천예술인회」 도 창설되었지만 유야무야로 이어지며 1950년 6월 11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이하 문총) 인천지부가 미국공보원 인천분원에서 결성돼 문학분과위원장에 한상억을 추대했다. 이인석, 김차영, 조수일 씨 등이 참석했으며 동란이 발발해 ‘ 문총구국대’로 명칭을 바꾸고 많은 문인이 참석해 명실상부한 인천의 문인모임이 태동하게 된다.
문총구국대 이후 「문학가협회 인천지부」, 「군사계몽작가단」, 「인천시인협회」, 「자유문학가협회」 등 분립의 상태는 계속됐지만 때마다 시인 한상억은 후배 (연령적으로)들을 이끌며 선봉에 섰던 혼란기의 인천문화 창달의 선구자였으며 인천문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강화군 양도면을 고향으로 둔 시인 한상억은 (1915. 9. 1 생, 호는 二錄) 강화 온수초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해 1935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금융조합의 서기와 일인 경영의 「식량영단회사」 강원지사의 사원을 지내기도 했다.
1947년 「시와 산문」 동인을 시작으로 문인의 길을 걸었지만 정작 문단에 적을 올린 것은 8년 뒤 「자유문학」에 ‘네거리에서’ ‘평행선’의 2편의 시를 추천 받음으로써 시작됐다. 이후 ‘대립’(58년 자유문학) ‘아침’(71년 월간문학)등을 발표하면서 중앙문단에 텃밭을 일구어 나갔다.
1961년 첫시집 「평행선의 대결」(범조사 발행)을 상재, 인천시립도서관(율목동) 정원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연이어 「인천찬가」를 펴냈으며 15년간의 긴 잠복기 끝에 회갑기념으로 제2시집 「창변사유」(76년 현대문학사)를 출간, 문인으로서의 맥을 찾기에 이르렀다. 인생년륜의 경험적인 토대로 읊어진 시들로 생에 있어서 사(思)와 행(行)의 이율배반적 논고의 평행선 구도를 논하고 있는 첫 시집에 비하여 체념과 사유의 깊은 인생철학의 내면을 묘사한 「창변사유」는 구원의 길을 찾는 시인의 고뇌가 물씬 풍기는 시로 평가된다. 이는 아마도 깊은 신앙심(즈음 성산교회 수석장로 였음)의 발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동향 출신의 작곡가 최영섭과 교우하며 우리 강과 산을 주제로 한 가곡의 작시를 의뢰받고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하여 62년부터 주옥같이 사랑을 받는 국민가곡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인천을 주제로 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영산에 가보고 싶은 국민들의 목마른 정서가 시 속에 승화되어 애창하게 된 것이다. 통일의 염원을 그는 시로 화답한 것이다.
「주간인천」 주필, 「인천신보」 논설위원, 한국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 경기지회장등을 역임하며 68년 동안 인천을 위하여 살았다해도 과함이 없는 향토시인, 그는 정말 인천인이다. 인천의 곳곳에 시인의 얼이 따뜻하게 남아 있구나. 산에도.
摩 尼 山(마 이 산)
맑게 갠 개천절의 오후
피크니크를 나온 서울 사람들의
츄잉검 종이가 산길에 산란해도
오천년이라던가 寢寞(침막)의 터전
여기는 도회의 공원이 아니다.
都會(도회)와 바다는
내가 지나온 인생의 시장.
한 덩어리의 부동체 속에선
한 방울의 인간성은 溶解(용해)될 뿐,
망망한 평야와 바다와
기복하는 산과 隱現(은현)하는 섬에
교회의 尖塔(첨탑)도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도 발견되지 않고
뼈저린 寢寞(침막)만이 흘러도
구름이 발아래 머흐는
참성단의 내 마음은 번거롭구나.
어느 절세의 풍경화가가
여기를 다녀 갔던가.
어느 稀代(희대)의 논리가가
저 푸른 하늘에 한숨을 보냈던가.
檀民(단민)의 핏방울이 돌옷으로 화한
壇石(단석)을 만지며
나는 시야를 넘는
저 都會(도회)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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