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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연의 인천각(仁川閣)

by 형과니 2023. 5. 20.

최성연의 인천각(仁川閣)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09-01-30 11:14:51

 

최성연의 인천각(仁川閣)

·김학균 시인

 

 

후덕하게 보이던 소안(素眼) 최성연(崔聖淵) 선생은 정말 아버지 같은 분이다.특히 나에게는 어린시절(3)부터 인연의 끈을 주신 분으로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종군기자의 예리한 눈은 가슴속에 숨기고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며 꼭 마음속에 칼 한자루를 품고 관조하신 것 같다.

 

1994년 초여름(616) 팔순잔치가 열렸던 간석동의 갤럭시 호텔이 생각난다. 축가를 부르던 중 그만 가사를 잊은채 전전긍긍했던 생각이 지금도 창피만발, 음치다운 음치의 표본을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문단의 후배로는 손설향 시인과 이석인 시인, 그리고 필자 그렇게 3명만이 참석한 그때를 생각하면 문인으로서 면목이 없어 죄송하기까지 했었다.

 

칠순(84)이후 시름시름 아프시던 선생은 팔순쯤에는 훌훌털고 사진기를 들고 다닐 정도로 쾌차하여 참으로 기쁘기 한량이 없었다. 다시 6년전 기호일보의 서강훈 사장의 배려로 나온 갈매기는 사라졌는데의 출판기념회는 김길봉 인천문화원장의 발의로 중구 관동에 있는 중국집 동보성에서 이루어졌다. 젊은 문사(?)들이(이석인, 김학균) 선생의 여적과 대표시를 낭송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더 잘 모시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5·16 군사혁명이후 폐간, 복간을 거듭한 서울신문의 지사장을 하던 19623(염업사무실, 지금의 중구청 앞) 나는 그 신문을 배달하는 학생으로 (연극인 전무송씨와 함께) 인연의 타래를 풀기 시작하였으니, 실로 4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화도진에서 이루어 진 사실을 고증하고, ‘청구사진문화사를 경영하며 심판자를 제작해 극영화에 공헌했다. 또한 인천 시민 행진곡의 가사를 만들고, 인천 시립교향악단 출범에 기여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종군기자로서 외국인에게 인천의 역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깊은 사명감을 발휘 지역알기에 매진해 오늘의 지역사 연구의 필독서인 개항과 양관역정을 탄생시켰다. 허나 뭍혀 버릴 것 같은 문학의 업적은 전자 못지 않은 찬사를 받으며 시조계의 거성으로 우뚝섰다.

 

현대 한국문학의 분수령은 해방 연대가 아니고 한국전쟁 종전 시기인 1955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조시단의 새로운 기운이 일기 시작한 것도 1955<동아일보 창간 35주년 기념 현상문예공모>에 최성연의 핏자국(훗날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지칭)이 당선되면서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소재의 새로움과 상징적 기법에 의한 표현, 현실상황을 일관되게 주제로 삼은 현대 시조의 개척자로서 평가 받았다. 최전방 관측소에 전쟁종군기자로 참전했던 경험을 살려 처절한 전쟁상황을 그린 핏자국은 시조시단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현대시조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얻어 인천문인으로서의 긍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같은 해 첫 시조집 은어를 상재하면서 그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널리 알리게 된다. 일석(一石)이희승(李熙昇)은 이 책의 서문에서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담기에 성공할 것이다.’ 라며 격려하였다. 특히 이 시집은 좌수서(左手書)로 유명한 검여(劍如) 유희강이 쓴 제호와 천경자 화백의 표지화가 특징이다.

 

그는 1914년 중구 율목동에서 출생, 아홉살에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에 입학, 중학교를 거쳐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교)를 마치고 평북강계 영림서에서 십여년간 근무했다. 그후 다시 인천으로 내려와 송학동에 정착하며 김숙양과 결혼, 칠남매를 둔다. 서구 가정동에서 아내, 아들 내외, 손자 등과 유복한 말년을 보내다가 1988년 세 번째 시집 갈매기도 사라졌는데를 남기고 2000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게으름 없이 인천사랑 실천에 매진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흉상하나 없다함이 참으로 안타깝다. 근간 만국공원(자유공원) 복원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먼저 오르면 어떨까. 88년 작으로 종군기자 시절을 회상하며 쓴 시조, 여적을 달아 역사공부에 일조하는 글이다.

 

 

오정포산 허리 짬에

이리저리 참호(塹壕)파고

아람두리 나무통들

가로 세로 딩굴렀는데,

 

인천각(仁川閣)

그 호화롭던 양옥(洋屋)마저

심한 함포(艦砲)맞고

폭삭 주져 앉았다.

 

집 맵시 뛰어나고

쓸모 또한 큰 탓일까

모른채 석달 내내

고스란히 남겼다가

 

갑자기

 

십자 포격으로

수월하게 쳐부수다.

 

인민군 군관들이

은신처로 잘못 알고

 

꾸역꾸역 모였다가

삼태기 쓴 꼴

됐다던가

 

어렵게

전쟁 겪고 세우더니

끝내 전쟁 탓에

쓸어지다.

 

 

餘滴 : 오정포산(午正砲山)의 본 이름은 응봉산(鷹峰山)인데, 일제 때 이곳에 있던 인천측후소에서 오정(12시정각)에 소형 산포(공포)를 발사해 오정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인천각은 1904년 러일전쟁이 그치자 영국(스코틀랜드)인 제임스·존스톤씨의 하계별장으로 건축되었는데 놀랍게 거금 30만달러를 투자한 그 당시 인천 최대 최고의 호화판 4층 건물이었다.

 

그런데 인천각은 인천상륙작전 바로 직전에 거대한 미국전함의 포격을 맞고 폭파되었다. 존스톤씨는 인천각이 몹시 흡족했었던지 일찍이 같은 설계의 쌍둥이 저택을 상해에도 지었다고 하는데 그는 상해조선소의 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