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애환이 어우러진 전통시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2-19 15:24:13
삶의 애환이 어우러진 전통시장
조선 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장시(場市)’라는 용어가 나온다. 낯이 설지만 학자들은 시장(市場)과 다름없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고, 저잣거리 백성들도 최근세까지 상설 시장 혹은 5일장을 ‘장시’라고 일컬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고 유명한 장시는 서울 종로의 육의전(六矣廛)이었지만, 지방의 장시는 대부분 5일장이었다. 이를 사회사적 의미로 본다면 장시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중심가에 위치해 있었다는 그 시공적(時空的) 특성과 기능에 주목하게 된다.
글·조우성(시인ㆍ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인천 지역의 대표적인 장시로는 강화 읍내장과 황어장 등을 들 수 있는데 그곳이 3·1운동 당시 만세의 시발지였다는 것은 시장의 사회사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1919년 3월 18일 강화에서 1만여 명이 참가했던 시위는 그만큼 장의 규모가 컸음을 짐작케 한다.
그 ‘장시(場市)’가 ‘시장(市場)’으로 명칭과 기능이 바뀐 것은 개항 이후의 상품 경제 발달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장시에 대한 관리·통제를 위해 ‘시장 규칙’을 반포한다.
인천에 장이 아닌 상설 시장이 들어선 것은 ‘시장 규칙’ 이후다. 해강 김규진보다 앞서 사진술을 익혔던 황철(1864~1930)의 개항 초 제물포 풍경 사진을 보면 해안가에 좌상들이 보이는 데 그것이 아마도 상설 시장의 전신이 아니었던가 싶다.
첫 상설 시장은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어시장(魚市場)이었다. 1895년 인천 수산업계의 대부로 알려진 정흥택이 근해 어업자들의 어획물을 사들여 내리(內里·내동)에서 팔아오다가 1902년에 상설 어시장을 개설했던 것이다.
이 같은 한국인의 움직임에 대해 지역 내 상권 장악을 꾀했던 일본인들은 1905년 정흥택의 어시장 건너편에 같은 유의 시장을 개설해 한동안 판매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 상대의 장사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그들은 판매 전략을 바꿔 값비싼 선어만을 취급하며 일본인 고객을 상대했다.
어시장보다 뒤늦게 등장한 것이 농산물 시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지금의 신포동에 시장을 개설한 것은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청국인이었다. 하지만 그들 시장은 ‘시장 규칙’이 공포된 10여 년 후인 1927년 모두 인천부 직영으로 바뀌었다.
생선류를 파는 어시장인 제1시장은 1929년 12월에, 청과류를 다루는 농산물 제2시장은 1933년 7월에 각각 신포동에 건물을 신축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경영에 들어갔는데 제1시장은 벽돌 단층 1동에 28구획, 제2시장은 목조 단층 1동 31구획 규모였다.
그 뒤를 이어 ‘공설 청과물 시장’이 1930년 지금의 중구 인현동에서 문을 열었다. 세칭 ‘깡’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인천청과물주식회사가 농산물 시장의 부영 대행권을 출원하면서 일본인이 주축이 된 인천물산주식회사와 경쟁 관계에 있다가 자본 합병에 따라 청과류는 인현동 시장에서, 채소류는 신포동 시장에서 각각 판매하였다. 이 일대에는 과일가게들이 즐비해 언제부턴가 ‘참외전 거리’라고 불렸는데 비만 오면 흙탕길로 변해 발목까지 푹푹 빠져 큰 곤욕을 치르곤 했다.
시장 개설 노력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935년 무렵 한국인 박영섭이 동인천역 부근에 벌집 모양의 시장을 개설한 데 이어 유창호가 송현동 개천가에서 야시장을 운영해 오늘의 시장 개설의 터를 닦아놓았다. 1936년에는 인천부가 송현동에 양철지붕을 얹은 ‘송현 일용품시장’을 열었는데 6·25전쟁 직후 그 인근에 미제 물건을 파는 속칭 ‘양키시장’이 들어서서 성황을 이루었다.
탱크만 빼고 다 살 수 있다는 다소 과장된 일화가 전해지고는 있지만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주류, 육류, 커피류, 군복류, 군장비류, 화장품류에 플레이보이지와 콘돔까지 팔았고, 암달러상까지 대개 겸하고 있어서 풀방구리에 생쥐 드나들 듯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순수 민간 시장의 개설은 인천 지역의 사회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광복 직후 귀환한 동포들의 정착과 6·25전쟁 후 월남한 이들이 호구지책으로 널빤지를 모아다가 노점을 차리기가 부지기수였다.
“시내에 산재하고 있는 노점은 일증월가(日增月加)하여 그 수가 약 500여 개에 달하고 있다. 먼지 가득한 길가에서 떡국, 장국밥을 팔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당시의 지역지 대중일보가 보도할 정도였다.
이들을 규합해 어엿한 상설시장을 만들려고 나선 이는 이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제물포상인보존회는 재정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윤무준이 인천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박차를 가했다. 윤 서장은 무허가 건물의 난립을 막는 한편 그들의 생업을 돕기 위해 강원실, 이순효 등으로 애지단(愛志團)을 결성케 하고 자유시장을 건설케 했다.
그러나 노점상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해 개천가와 건너편 ‘하꼬방’에 둥지를 틀어 남쪽으로는 배다리 철교, 창영동 꿀꿀이죽·양고기 골목, 영화학교 철길까지 이어졌고, 북쪽으로는 화평동 철교에서 전동 구름다리와 만석동까지, 동북쪽으로는 옛 산업도로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하꼬방’ 시장이 이어졌다(고일 인천석금).
그 후 자유시장이 일제 강점기 때 만든 공설시장과 합병해 규모를 늘려 훗날의 중앙시장으로 발전해 나갈 기반을 마련하게 되자 이에 영향을 받아 부평역전시장, 답동시장 그리고 옛 송월동의 돼지 장터에 송월동시장과 숭의시장, 송림시장 등이 속속 들어섰다.
1950년대 인천에서 가장 큰 시장은 중앙시장이었다. 동인천역에서부터 배다리까지 이어진 이 시장은 서민들이 집안의 대소사를 한 곳에서 다 해결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따금 화재를 당해 손실이 컸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시장의 판세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상권의 이전, 시장 규모의 확장 등 큰 변화를 겼었다. 중구와 동구 소재 시장은 상대적으로 정체 내지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대신 부평구, 계양구, 연수구, 남동구, 서구 등지의 상권은 과거보다 개선된 시설과 점포수의 평준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재래시장은 현재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처지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백화점, 대형 마트 등과의 경쟁에서 열세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최근 동구가 벌이고 있는 동인천역 역세권과 송현시장의 개발은 주목 받을 만하다.
지난 해 동구는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송현시장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지정 받아 전국 4개 선정 시장 중에 가장 많은 48억원의 국비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이다.
시장 도입 한 세기 만에 재래시장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재벌들의 대자본이 투입된 백화점, 마트 등과의 싸움에서는 다소 밀릴지 모르나 인정미 넘치는 지역사회의 전통적 생활공간으로 꾸준히 가꾸어 간다면 재래시장은 시민들 곁에 길이길이 남아 숨쉴 것이라 믿는다.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짜로 맛나는 자장면을... (0) | 2023.05.22 |
---|---|
인천의 성냥공장 (0) | 2023.05.21 |
한국의 차이나타운 (0) | 2023.05.21 |
한국 화교의 특징 (0) | 2023.05.21 |
다시 한국을 찾는 華僑 (0) | 2023.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