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인천지역사회의 변화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4-10 11:58:28
6·25전쟁과 인천지역사회의 변화
양윤모(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1950년 6월 25일 새벽,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군의 전면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채 2년이 안 된 시점이었다.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됐다. 4일 만에 수도가 북한군에게 넘어갔으며 9월이 되기도 전에 낙동강 선까지 쫒기게 됐다. 다행히 유엔군의 개입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반격의 시간을 갖게 됐고,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 시민 생명과 안전 책임자 시장이 먼저 피신
인천지역이 북한군 수중에 완전히 들어간 것은 1950년 7월 4일경이었다. 갑작스런 북한군의 침공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김포 방면에서 계산동과 부평, 장수동을 거쳐 남하했다. 이에 따라 부평과 남동 지역의 주민들 역시 피난길에 올랐다. 특히 나흘 만에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하자 수도권 일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수도를 방어하겠다는 라디오 성명을 발표한 채,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고 남하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수뇌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인천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민들의 생명과 안정을 책임진 최고 책임자인 지중세 시장은 누구보다 먼저 인천시를 빠져 나갔다. 공공기관이 붕괴되자 하상훈과 김득하를 비롯한 인천의 지도급 인사들이 나서 긴급한 행정조치와 후방의 치안문제 등을 담당하고자 했으나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인천 시경의 황규섭 보안과장이 이끄는 소수의 경찰 병력이 인천 청사를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북한군이 인천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인천을 사수하고자 했던 청년방위대의 김득하 단장이 교전 중 전사하기도 했다.
인천을 점령한 북한군은 해광사에 정치보위부를 설치하고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반동분자들을 색출했지만, 군경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남하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민위원회가 설치된 이후 각 동에 구성된 인민위원회에 의해 자행된 인민재판으로 양민들이 희생된 일이 발생했다. 1950년 7월 6일 간석동 원통고개에서 15명의 양민들이 북한군에 의해 학살된 ‘원통고개학살사건’이 그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인천지역의 우익인사들과 사상범들을 인천경찰서 유치장과 인천교도소에 수감했는데, 이 중에는 전 인천시장 표양문과 전 부평경찰서장 신보현도 끼어 있었다. 이들 중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인사들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후퇴하는 북한군에게 대부분 사살됐고, 인천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북한군의 통신 두절로 학살을 면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맥아더가 말한 바와 같이 “전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른바 1·4후퇴와 회복을 반복하며 전선은 38도선을 중심으로 고착됐다. 지중세 시장은 다시 시청 직원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인천시에서는 부산에 인천피난민 부산연결사무소를 설치하고 군산과 목포·제주에 지소를 두어 인천 피난민의 편의를 도모했다.
인천시가 재수복된 것은 1951년 2월 10일경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2월 3일 인천 외항 일대를 봉쇄한 다음 2월 10일 팔미도를 통해 제2차 상륙작전을 감행, 북한군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덕적도에 대기 중이던 해병대 주력을 상륙시켜 인천의 북한군을 소탕했다. 그리해서 인천지역은 두 번에 걸쳐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다가 탈환됐고, 그때마다 주민의 안전을 책임진 공공기관들이 먼저 인천을 떠난 결과가 됐다.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북한군과 중공군이 현재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극심한 소모전을 계속하다가 결국 1953년 7월 23일 휴전협정이 조인돼 6·25전쟁은 일시적으로 끝이 났다. 비록 대한민국은 참전 당사국 중 유일하게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권이 유엔군사령부에 이양돼 있었으므로 휴전이 성립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 전쟁은 신생국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던 대한민국에 크나 큰 타격을 주었다. 사회·경제적인 면은 말할 것도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남북간의 증오심은 몇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지속돼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마저 회복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 전쟁으로 시민 구성비율 급변, 산업기반 붕괴
무엇보다도 6·25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인천지역의 가장 큰 변화는 주민 구성의 변화였다. 38선과 휴전선에 가까운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인천지역에는 많은 피난민과 구호민이 몰리게 됐다. 1953년에 간행된 『인천시세일람』에 따르면 1952년 말 현재 인천지역의 구호대상자는 총 13만여 명으로 인천 총인구 25만6천여 명의 51%를 넘고 있다. 그리고 구호대상자 가운데 인천주민은 6만7천여 명, 6만3천여 명으로 거의 반반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피난민이 많았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인천의 산업기반은 철저히 무너졌고 정부 차원의 구호작업도 변변치 못했다.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에는 제분공장과 방적공장이 있어 산업적으로 의식주에 상당히 유리한 곳이었다. 제분공장은 일본제분의 인천공장과 풍국제분의 인천공장이, 방직공장으로는 동양방적이 그것이다. 해방 후 제분공장은 비록 원료 부족과 전력난으로 가동이 원활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전쟁으로 제분시설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말았다. 이 공장들이 다시 가동을 시작해 정상가동을 하게 된 것은 1954년 이후였다.
일본제분의 인천공장을 인수한 대한제분의 북성동 인천공장은 특별외화대부금 23만 달러를 들여 일본에서 새로운 기계를 도입한 이후 비로소 1천954배럴 규모로 생산을 개시했다. 먹는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직물산업의 중심이었던 인천의 동양방적 역시 전쟁으로 40% 가까운 기계설비가 파괴되고 말았다. 비록 인천이 재차 수복된 이후 1951년 11월경부터 부분 가동에 들어가긴 했어도 구호품으로 활용되기에는 어려웠다.
결국 전쟁 기간과 이후 구호민들에 대한 구호의 대부분은 유엔 및 외국의 정부와 민간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지해야 했다. 그 결과 1954년 12월 말쯤에는 인천주민이 약 18만8천 명인데 비해 피난민은 7만4천여 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긴급하게 구호를 해야 하는 구호자는 인천주민 1만여 명이고 피난민이 1만 1천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어 구호 활동이 매우 양호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민간인에 대한 구호 활동과 더불어 인천지역의 산업 및 문화시설의 복구에는 1953년 10월 발족한 한미친선위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 위원회는 인천의 각계 전문가와 미국 제21항만사령부의 참모들이 모여 발족한 것으로, 각 부문에 걸쳐 복구사업을 체계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 위원회에서는 도로보수 및 방화시설 그리고 공설운동장 육상경기장 수리 및 보수를 위해 1954년과 1955년에 각각 25만 달러와 50만 달러에 해당하는 건축자재를 지원하는 등 인천지역의 복구작업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 황해도 민속 보존에 기여한 황해도민회
인천지역의 피난민들 대부분은 물론 북한에서 남하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1·4후퇴 이후 많은 북한 주민들이 남하해 남한 각지에 있다가, 휴전이 되자 휴전선과 가까운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이주했다. 인천은 지역적으로 가까운 황해도 이주민들이 많았다. 인천지역 실향민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해서 1947년도에 이미 이북지역 도민회 중 황해도도민회가 가장 먼저 결성됐고 규모도 가장 컸다. 이처럼 황해도도민회의 활동이 활발한 것과 관련해 인천지역에는 황해도의 민속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은율탈춤보존회와 평산소놀음보존회가 결성됐을 뿐만 아니라 강령탈춤 예능보유자 역시 인천지역에 거주해 황해도 지역 특유의 민속이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보존·전수되고 있기도 하다.
<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기호일보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이 공동기획해 2007년 6월 5일 ’개국(開國)과 왕도(王都)의 고장, 인천'을 시작으로 매주 화요일 게재해온 <인천역사산책>을 오늘 93회인 ‘6·25전쟁과 인천지역사회의 변화’로 일단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인천역사산책〉시리즈는 그 동안 집적된 인천지역사 자료를 중심으로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인천시민들이 보다 이해하기 쉽고 알기 편하게 각 시대별, 토픽(Topic)별로 정리한 것입니다.이에 무엇보다 인천사의 대중화에 바탕을 두고 역사가 주는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를 벗어나 인천시민들이 한층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서술, 내 고장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증폭돼 인천사랑으로 발전됐다고 자부합니다.
1년 10개월 동안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강덕우·강옥엽 역사전공 전문위원을 비롯해 교수, 교사, 박물관 학예연구사, 향토사 연구자 등 10여 명 넘게 구성된 각계 집필진은 ‘개국과 왕도의 고장,인천’에서부터 6.25전쟁 때까지 ‘인천역사의 쟁점과 과제’에 걸쳐 역사가 흐르는 문화도시 인천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주제를 설정해 집필했습니다.
이제 집필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천역사산책>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집필 구상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와 검토를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글을 정리해 책자로 집대성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동안 <인천역사산책>을 열독해주시고 성원해주신 애독자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그 동안의 집필진(무순)을 소개해드립니다. ▶강덕우(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강옥엽(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견수찬(인하대 박물관 학예사) ▶김상렬(인천시립박물관 유물조사팀장) ▶남달우(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문상범(제물포고교 교사) ▶배성수(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손장원(인천재능대학 실내건축과 교수) ▶이영태(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BK21 연구교수) ▶이현주(국가보훈처 연구관) ▶이희인(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임학성(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교수) ▶채영국(국민대 연구교수) ▶유창호(옹진군지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양윤모(인하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남동걸(인천시 중구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기석(송도중학교 교사) ▶이명운((주)시아대표/인천의제21 관광코스개발단장) ▶장태한(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교수) ▶이성진(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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