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미영화(歐美映畵)의 창작과 전래
르미에르(Louis Lumiere)형제
구미영화(歐美映畵)의 창작과 전래
구미영화는 1895년 프랑스의 르미에르(Louis Lumiere)형제에 의해서 창작되었다. 그들 형제의 경이적인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의 성공으로 오늘날 영화의 효시인 토막영화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획기적인 개가(凱歌)가 결코 그들 형제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구미에서 이러한「움직이는 사진」의 구현을 위한 과학적인 추구는 1839년 프랑스의 다게르(L.J.M. Daguerre)가 정사진(靜寫眞)을 발명한 바로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세라아스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오롱, 미국의 헤일 등 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와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그 연구개발에 정진해 왔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1890년 10월에 특수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개발하여 이를 공개한 바 있는 미국 에디슨(Thomas Edison)의 공적은 실로 르미에르형제에 버금가는 훌륭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구미영화의 창작은 반세기를 통하여 온 과학자 연구의 개화이며, 만능을 이루었던 19세기 구미과학문명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창작당시의 작품은「달리는 기차」「바다의 풍물」「카페에서 춤추는 아가씨들」등 불과 30∼40피트에서 50∼60피트 안팎의 짧은 토막필름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떤 사물이나 풍물의 움직임을 수록하여 이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의 무궁한 발전적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초창기 1∼2년 동안은 신기하고 마력적인 구경거리로서 주로 카페의 캉캉춤 무대라든가 마술공연장 등에서 서비스나 또는 첨가프로로 이용되었으나 1908년에는 세계영화배급업자회의(世界映畵配給業者會議)가 파리에서 개최되어 영화의 독립성이 제언되었다. 물론 당시 업자회의에서는 영화를 공연장의 서비스나 추가프로에서 독립적인 종목으로 끌어올려 그 흥행시장을 확보하고 확대해 나가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러한 목적은 영화의 기술적 예술적 발전에 하나의 새로운 도약대(跳躍臺)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화기업화운동의 선편(先鞭)을 치고 나선 사람은 프랑스의 죠르쥬 멜리에스(George M**eleies)였다. 마술사(魔術師)이면서 극장주이기도 했던 그는 1900년에「신데렐라공주」라는 영화를 만들어 갈채를 받은 바 있었고 1902년에는 약 900피트의 당시로서는 대작인「월세계여행(月世界旅行)(La voyage dans La Lune)」을 만들어 세상을 경탄케 하였다. 이 작품은 최초의 공상과학영화로서 유상적(幼想的) 기법을 자유로이 창안 구사함으로써 그는 최초의 영화언어의 발명자이며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작품이 전세계 영화배급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각국 영화연구 내지 제작자들에게 큰 충격과 가능성을 제시해 준 것이 더욱 의의있는 일이었다.
가장 큰 충격을 받고 그 감명을 작품에 쏟아넣어 기념비적인 작품을 완성한 사람은 미국의 에드윈 포터(Edwin S.Porter)였다. 그는 1902년에「아메리카 소방수의 생활(The Life of an American Fireman)」과「대열차강도(大列車强盜)(The Great Train Robbery 1903)」를 발표하였는데 포터는 여기에서 화술적 표현기법으로 미국 특유의 활극과 서부극의 기저(基底)가 된 액션 드라마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구미영화계는 발전 성장해 나갔고 동시에 해외시장개척에도 점차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신작은 아니지만 초창기의 토막작품들이 우리나라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이 때 우리나라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인하여 서구문명이 정치 · 사회 · 문화 · 교육 등 각 분야에 걸쳐 들어오게 되자 구미영화도 이에 편승하여 창작된지 8년만에 초창기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최초로 외국영화가 한국에 등장한 1903년부터 한국영화가 창작된 1919년까지를 한국영화사의 사전시대(史前時代)라 할 수 있다.
외국영화의 전래시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일찌기 안종화(安鍾和)는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외교관들을 모아 상영한 것이 외국영화의 효시이고 1909년 동대문의 전기회사 창고에서 공개상영한 것이 최초의 영화흥행이라고 술회(述懷)한 바 있다.
한편 아세아영화사(亞細亞映畵史) 연구가인 일본인 시천채(市川彩)는 1898년에 미국인 이스트 하우스가 남대문의 한 창고에서 유료상연한 것이 효시이며 1903년∼1904년경에 동대문전차창고에서 미국인 콜브란(Collbran)과 보스트(Bostwick)이 자기 회사의 권연초선전(卷煙草宣傳)을 위하여 영화관람장을 개방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1903년 이전에도 당시 본국을 왕래했던 구미각국 외교관들에 의해서 토막영화가 유입되어 파티장에서나 친선모임 같은 자리에서 자기나라의 문명을 자랑삼아 상영했겠지만 한국민에게 공개흥행된 것은 1903년 동대문전차창고에서의 상연을 그 효시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황성신문 광고문에서 볼 수 있다.
「동대문내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시술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설행(設行)하는데 한국과 구미 각국의 생명도시(生命都市) 각국의 절승(絶勝)한 광경이 구비하외다. 입장료 동화 십전
이 때 토막작품인「달리는 기차」「바다 풍경」등에서 산더미 같은 파도가 스크린 위에 나타날 때는 놀래고 겁내어 쉽사리 활동사진에 친숙해 질 것 같지 않았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하나의 신기한 마술적인 구경거리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이것은 19세기 구미과학의 소산이며 가장 첨단적인 문화적 총아(寵兒)임을 과시하면서 영화가 일착으로 이 땅에 상륙하였지만 뿌리를 내릴 토양이 없어 하나의 마술적 흥행으로 전락되었다. [원글:서울시6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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