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과 한국영화의 창작
신극운동은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의 일익을 담당하고 국어계도(國語啓導)에 앞장서기 위하여 시작되었으나 점차 변질되어 대중적인 기호와 취향에 영접하려는 신파로 전락되었다. 그런데 16년이란 오랜 사극시대(史劇時代)를 거치는 동안 한국영화는 신파무대극의 흥행목적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기형적인 연쇄활동사진(連**活動寫眞)이라는 형태로 발생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극장은 궁내부(宮內府) 소속의 협율사(協律社)였다. 협율사는 1902년 고종황제어극 40주년 칭경예식에 참석한 많은 외국사신들을 초빙하여 전통적인 가무와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서 건립된 것이었으나, 이러한 행사가 생략되자 국립극장격인 협율사는 기녀들의 가무를 비롯하여 줄타기와 마술까지 공연되었고 한때는 외국영화까지 상영되었다. 이렇게 되어 연예흥행이 저속하고 난잡하다는 비난이 빗발치자 1906년에 이를 폐쇄시킨 것을 1908년 당시 대한신문사장이며 신소설작가인 이인직(李人稙)이 이를 인계받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연극장을 개설하고 자작소설『은세계』를 상장(上場)시키므로써 한국 신극운동의 첫 막을 열었다.
원각사에서의 연극은 크게 성공하지 못한 채 1909년 11월 폐관되었으나 이인직을 따라 무대에 섰던 젊은 문하생들에 의해서 연극의 뿌리는 깊이 내려졌다. 그 문하생인 임성구(林聖九)는 동료인 김도산(金陶山) · 임인구(林仁九) · 김소랑(金小浪) · 박창한(朴昌漢) 등과 더불어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여 신극운동을 이어 나갔다. 한편 일본에서 귀국한 이기세(李基世)는 1910년 개성에 개성극장을 짓고 유일단(唯一團)을 조직하여 신극운동에 나섰으며 일본에서 귀국한 윤백남(尹白南)도 1912년 조중환(趙重桓)과 더불어 극단 문수성(文秀星)을 조직하여 이에 참여했다.
이 무렵 서울에 7∼8곳의 극장이 세워졌으니 광무대(光武臺), 장안사(長安社), 연흥사(演興社), 단성사(團成社) 등은 한국인을 관객으로 하는 극장이었고 어성좌(御星座), 고등연예관(高等演藝**), 수좌(壽座), 가무기좌(歌舞技座) 등은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극장이었다.
이처럼 점차 극장이 늘어나고 관객이 증가됨에 따라 신극계에는 임성구 · 윤백남 · 이기세 · 김도산 · 김소랑 등이 인기를 유지하려는 경쟁의식으로 대중을 의식하여 대중의 취향에 알맞는 것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른바 무대에 활동사진을 연결시키는 연쇄활동사진극이었다. 최초의 공연은 황금관(黃金館) 신축개관 2주년기념공연으로 일본에서 연극단 뢰호내회(瀨戶內會)가 초청되어 공연하였다.
연쇄활동사진극이란 무대의 공간적 제약으로 표현하기 여러운 장면, 즉 자동차와 배로 추격하는 장면이라든가 아름다운 실경(實景)이 배경으로 필요할 경우 이를 야외에서 촬영하여 진행되는 무대극과 영사(映寫)로 연결시킴으로써 이야기를 이어가게 하는 방법이었다.
연쇄활동극에서 감명을 받은 신극좌의 김도산(金陶山)은 1년후인 1919년 7월 박승필이 경영하는 단성사에서의 장기공연을 계기로 박승필과 친숙하게 되었는데 박승필은 당시 한국에 활동사진이 없음을 개탄해 오던 터라 김도산의 연쇄할동극 촬영계획을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박승필은 제작비조로 5,000원의 거금을 내놓아 김도산의 계획대로 「의리적 구투(仇鬪)」,「시우정(是友情)」,「형사고심(刑事苦心)」,「천명(天命)」등 네편의 연쇄활동사진극과 순수한 두편의 기록영화「경성전시의 경(景)」,「경성교외 전경」을 제작하므로써 박승필은 한국 최초의 영화극작가가 되었고 김도산은 최초의 연기자가 되어 한국영화의 개척자가 되었다.
제작된 작품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의리적구투」「경성전시의 경」이 상장 개봉되었기 때문에「의리적구투」는 한국 최초의 극적 내용을 담은 활동사진 필름이 포함된 연쇄활동사진극이 되었고,「경성전시의 경」은 한국 최초의 기록영화가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는「사진이 선명하고 미려할 뿐더러 배경은 말할 것 없이 서양사진에 뒤지지 않을 만큼 되었고 배우활동도 상쾌하고 신이 날만큼 하게 되었다더라」
[註2]
라고 시사평에서 찬양하였다.
이 작품의 촬영은 일본 대판(大阪) 천활사(天活社) 촬영기사가 담당하였으며 주인공 송산(松山)역에 김도산, 그 의형제인 죽산(竹山)역에 이경환이 분(扮)했는데 계모역에는 당대의 명여역형남배우(名女役型男俳優) 김영득이 출연하였다. 입장료는 특등 1원 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으로 매우 비싼 편이었다.
1903년 외국영화가 등장하므로써 16년의 전사시대(前史時代)가 끝나고 한국영화사의 새 장이 열려진 셈이다. 연쇄활동극「의리적투구」가 흥행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김도산의 신극좌에 뒤이어 가장 빨리 연쇄극제작에 나선 것은 이기세의 문예단이었다. 이기세는 이응주(여역형남배우) · 라효진 · 변기종 · 안광익 · 홍정현 등의 출연으로 연쇄극「지기(知己)」를 제작해서 1920년 4월에 상영하였는데 이「지기」의 촬영은 젊은 이필우가 담당함으로써 그는 한국 최초의 촬영기사가 되었으며 한국영화개척사의 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혁신단의 임성구는 박승필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학생절의(學生節義)」를 제작하였다. 여기에는 임성구를 비롯하여 박용구 · 한창열 · 김고호 · 강성열 등이 출연했는데 인천항을 배경으로 기선(汽船)과 쾌속정 등이 동원되어 촬영된 액션물이었다. 이기세의 문예단에서도 이필우 촬영으로 「장한몽」이 제작되는 등 2∼3년간에 걸쳐 혁신 · 신극 · 문예의 3대극단 사이에 키노 · 드라마(Kino Drama)시대가 전개되었다.
비록 초창기 한국영화가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신파극의 흥미거리로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극영화제작에의 기운을 직접 간접으로 촉진 양성시켰다. [원글:서울시육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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