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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의영화이야기

[5]발성영화기(發聲映畵期) 로의 이행(移行)

by 형과니 2023. 5. 26.

발성영화기(發聲映畵期) 로의 이행(移行)

메마른 영화풍토 속에서나마 한국영화계는 1935년에 이르러 몇가지 획기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하나는 작품촬영에 현대식 조명장치가 도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성영화제작의 성공이었다. 이는 곧 한국영화의 발성영화시대로의 이행을 뜻한다.

조명시설의 경우 일찌기 일본 명고옥(名古屋)의 고전제작소에서 연기와 조명기술을 연구하고 귀국한 김성춘은 방한준(方漢駿) 감독의「살수차(撒水車)」에서 근대식 80KW 조명장치를 사용하므로써 조명분야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으며 조명기술상에 새로운 측면을 개척하였다.


후자의 발성영화장치는 영화촬영의 제1인자인 이필우에 의해서 성공되므로서 우리 영화를 일약 2차원의 세계로 이끌어 올린 것이다.


이필우는 1926년경부터 미국에서 성공한 토오키장치를 우리나라에서도 개발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거의 10년 동안 연구하여 드디어 1933년에는 P.K.R.발성장치 설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발성장치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춘향전」(1935) 제작에 성공하므로써 무성영화시대의 종말을 내리고 발성영화시대를 구현케 되었다. 이「춘향전」은 이명우(李明雨)와 김소봉(金蘇峰) 공동감독에 이명우 및 이필우(李弼雨)의 직접촬영 및 녹음 담당으로 제작되었으며 연기진으로는 박제행, 한일송, 임운학, 이종철, 최운봉 등과 신인인 노재신을 비롯한 문예봉, 김연실 등이 대거 출연하였다. 발성시대로 접어든 영화계는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발성영화 제1탄인「춘향전」을 내놓은 경성촬영소에서「아이랑고개」(1935)에 이어「장화홍련전」을 제3탄으로 내놓자 한양영화에서도「아리랑 3편」을 나운규로 하여금 자작 감독 주연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음악영화인「노래조선」이 O · K영화제작소에서 나왔다. OK레코드의 밴드연주로 이난형, 라품심, 임생원, 강남향 등 당대의 O · K전속가수들이 출연하였다.


이 무렵 양주남이「미몽(迷夢)」으로 연출계에 데뷔하였다. 어느 방탕녀(放蕩女)의 이면생활(裏面生活)을 폭로한 이른바 악녀의 행장기(行狀記)로서 황운조 촬영에 이금룡, 김인규, 문예봉 등이 출연하였고 조택원이 문하생들을 데리고 찬조출연하여 이채를 띄었다.


1937년에는 나운규의 유작이기도 한「오몽녀(五夢女)」와 이규환의「나그네」등이 촬영되었으나 8월 9일에 이르러 귀재 나운규를 잃고 말았다. 향년 36세인 그는 1922년 12월 영화촬영중 순직한 김도산(31세)에 이어 두번째로 요절한 연출자가 되었다. 나운규는 한국영화 초창기부터 15년동안 한국영화에 언어와 사상을 불어넣었고 미학적인 영상을 창조하였으며 스스로 연기하고 극작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원작 각색 감독 주연을 겸한 작품이 17편이나 되었고, 연출만의 작품이 2편, 출연만의 작품이 9편이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는 당시 제작된 총영화편수의 1/4에 해당되는 전무후무한 공적(功績)이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도하신문들은「떨어진 명성」「눈물의 아리랑 주인공, 나운규씨 금일 요절」라는 제목 아래 대서특필(大書特筆)로 그 업적을 찬양하고 명복을 기원했다.


1938년으로 접어들면서 일제검열당국은 검열행정(檢閱行政)을 강화하여 한국영화의 언어와 민족사상을 말살하려 들었다. 더우기 한국영화가 발성화되어 국민과의 접촉이 심화되자 소위「성전」이라고 그들이 일컫는 중일전쟁에 한국영화인으로 하여금 영화제작을 통해서 참여케 하려는 음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회유와 협박으로 성봉영화사(聖峰映畵社)는 일본동보영화와 년6편의 전쟁국책영화(戰爭國策映畵)를 계약하여 제1편으로「군용열차」라는 군사영화를 제작키로 한 것이다.


이러한 군사 내지 국책적인 작품활동을 기피하고자 하는 영화인들은 의식적으로 검열에 무난할 문예물들을 영화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38년 후반부터 1940년경까지 한국영화계에는 문예영화 붐이 일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류치진 원작 윤봉춘 연출의「도생록(圖生錄)」(천일영화사 1938), 안철영의「어화(漁火)」(1939), 방한준의「한강」(반도영화), 이광수 원작 박기채 연출의「무정」(조선영화 1939), 최벽동 원작 김유형 연출의「애연송(愛戀頌)」(천일영화 1939), 정비석 원작 방한준 연출의「성황당」(반도키네마), 우수영 원작 류치진 대사 최인규 연출의「수업료」(고려영화 1940), 이익 원작 김유영 감독의「수선화」(조선영화 1940) 등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들 가운데에서 방한준의「한강」은 기록적 기법을 구사하여 농도짙은 한국적 사실주의 형성에 성공하였고, 안철영은「어화(漁火)」에서 어촌의 비극을 그렸는데 한국을 알지 못하는 일본인 편집인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춘원(春園)의「무정」도 조선영화사 창립작품으로 총력이 집결되었으나 원작세계의 재현은 불가능했고 방한준의「성황당」과 최인규의「수업료」그리고 김유영의「수선화」등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는 1939년에 두 개의 신식스튜디오가 새로 완성되면서 잠차 기업적으로 대형화되는 경향이 보이자 일제는 이의 전력화(戰力化)를 위해 획책(劃策)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의정부촬영소 현상공장이 월 29일에 낙성되었다. 그곳에는 최신식 현상 및 소부시설(燒付施設)과 녹음시설까지 완비되어 일본 신흥키네마 등원본일(藤原本一) 기사(技師)가 초빙되어 가동되었다. 다른 하나는 방산동 녹음공장의 준공이다. 시설비 50,000원으로 녹음기「스탠드 · 파네르」토교식(土橋式) 1기, 포타블(Portable) 동경발성식 1대, 이화학연구의 현상시설과「파르브데브라이 아이모」각 1대씩 3대의 카메라가 마련되어 동경발성(東京發聲)의 오진(奧津) 녹음기사를 초빙(招聘)하여 가동하였다. 이렇듯 촬영 기타 제작시설이 근대화되어 갈 무렵에 일제의 한국영화계에 대한 통제 내지 말살의 음모는 점차 진척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