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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의영화이야기

[6]한국영화의 수난

by 형과니 2023. 5. 26.

 [6]한국영화의 수난

 

1940년부터 한국영화계는 질식기(窒息期)를 맞는다. 일제는 이미 1937년 8월 만주의 괴뢰정부(傀儡政府)로 하여금 만주에 있는 모든 민간영화사를 해산시키고 국책회사(國策會社) 만주영화협회를 창립시켜 같은 해 10월에는 영화법을 공포하여 제작 수출입 배합 상영 등을 강제로 일원화하는 한편 이를 한국에서도 재현하고자 꾀하였다. 그 첫 책략으로 조선총독부의 소관과(所管課)인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에서는 1939년 10월에 관제인 조선영화인협회를 강제로 발족시켰다.

회장에는 안종화(安鍾和)가 선임되었고 상무이사에 안석영(安夕影), 이사에 이규환(李圭煥) · 서월영(徐月影) · 이명우(李明雨) 등이, 그리고 평의원에 최인규(崔寅奎) · 이필우(李弼雨) 등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1940년 2월에는 총회를 열게 하여 영화인의 등록제 의무규정 기능증발행 등을 의결케 하였다. 이는 영화인들을 빠짐없이 전열(戰列)에 참여케 하는 직접적인 통제이며 구속력이기도 하였다.


한편 영화인에 대한 기능심사위원회(技能審査委員會)도 조직되었는데 이는 기능심사가 아니라 사상심사기관(思想審査機關)이었다. 위원장에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장 본전무부(本田武夫)가 선임되었고 위원으로 사무관 시야진(矢野晋), 이사관 청수정장(淸水正藏), 경성제대교수 신도(辛島), 총독부편집관 중촌영고(中村榮考) 이외에 한국영화인협회장 안종화 등 수명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1940년 1월에는 각본대로 조선영화령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한국인 영화업자들을 축출하고 한국영화를 말살해 버리려는 계획아래 첫 단계로 조선영화제작자협회를 강제로 발족시켰다.


당시의 참가회원사로는 조선영화주식회사(최남주(崔南周)), 고려영화협회(이창용(李創用)), 한양영화주식회사(김갑기(金甲起)), 경성영화제작소(양촌기지성(梁村奇智城)), 조선예흥사(서항석(徐恒錫)), 명보영화사(이병일(李炳逸)), 조선구귀영화사(강기청삼(降旗淸三)), 조선문화영화협회(진촌용(津村勇)), 경성발성영화제작소(고도금차(高島金次)) 등 9개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본인 경영영화사는 배합위주의 영세한 문화 기록영화제작사에 불과했다. 한국측업자는 조선, 고려, 한양의 3사에 지나지 않았다.


불과 1년도 못되어 2단계조치로 영화계의 전시체제 확립을 위해서 모든 영화사는 해산하고 단일사를 조직하여 군사영화 제작만 강요하였다. 더우기 통합에 불응할 경우에는 생(生)필름 공급을 일체 중단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긴급총회가 개최되어 이창용, 진촌용, 고도금차 3사람의 소집위원이 선출되었다. 임시총회는 자본금 200만원의 단일사창립을 의결했다. 그리고 다시 최남주, 이창용, 강기청삼, 고도금차, 진촌용의 5명을 통합위원으로 선출하여 신사창립을 추진시켰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독자적으로 단일영화사를 설립하겠다는 신청서가 총독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경성남공회의소(京城南工會議所)의 전중삼랑(田中三郞), 조선문화협회의 진촌용(津村勇), 경성재계의 전천상치(田川常治), 한국인측 고려영화협회대표 이창용(李創用, 자본금 200만원 한상룡, 박흥식 등 발기)의 안(案)이 있었다.
다시 사장직을 두고 경성일보사장 어수세진웅(御手洗辰雄), 전학무국장 임무수(林茂樹), 한국인측의 박흥식 등으로 삼파 · 사파전이 벌어지기는 하였으나 총독부의 압력으로 당시 상공회의소의 전중삼랑을 임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업자들은 이미 신통합사에 참여한다는 의사표시로 영화사의 전재산을 총독부에 양도한다는 각서까지 제출해놓고 있는 터이라 두 손들고 축출(逐出) 당하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동 9월 10일에는 한국인업자들에 대한 제작허가가 취소되므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영화제작은 중지되었으며 1919년 이래 개척되어 오던 한국영화의 역사는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1942년에는 관제 조선영화제작 
주식회사는「약간의 재선(在鮮) 영화제작업자들을 대신해서 제작부문을 담당하였다.」고 자부하면서 1년 동안 평작 6편, 특별작품 6편, 시국물 20편, 문화영화 20편 등의 제작목표를 과시하고 발족하였으나 1945년 해방까지 7,8편의 군사 및 국책영화를 제작하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1943년에 만들어진 박기채의「조선해협」이라는 첫번째 작품은 지원병(志願兵) 부부를 주인공으로 황국신민화를 강조한 국책영화로 이금룡, 서월영, 독은기, 최운봉, 김신재, 문예봉, 김소영, 홍청자 등이 출연하였다.


두번째 작품인「젊은 모습」은 본격적인 일본군국주의작품으로서 주인공은 한국청년 지원병이었다. 감독 · 촬영이 일본인이며 일본의 동보(東寶) · 송죽(松竹) · 일영(日映) 등 영화사의 후원으로 환산정부(丸山定夫) 월형용지개(月形龍之介) 좌분이신(佐分利信) 영전정(永田靖) 등 중량감있는 일본연기자들이 대거 출연하였다. 제작되는 영화는 모두 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에서 계획되고 일본인 영화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군국주의 영화였다.


그리고 방한준의「거경전(巨鯨傳)」(1944), 최인규의「태양의 아들들」(1933),「사랑과 맹서」(1945),「신풍의 아들들」(1945), 신경균의「감격일기와 우리의 전장」등 군사시국영화를 제작하다 패망과 더불어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19년 발생된 일제하의 한국영화는 20여년간의 억압, 곤욕의 상흔(傷痕)만 남긴채 질식되었던 셈이다. 그것이 얼마나 가혹했던 가는 일제치하 36년간의 총제작편수가 140∼150편에 불과했으며 무려 60여 군소제작소가 명멸도산(明滅倒産)되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하의 영화제작사의 평균존속수명은 5.3개월이었으며 매사의 평균제작편수는 2편에 불과(극영화의 경우)하였으니 겨우 1사 1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인구는 감독 44명, 각본 55명, 촬영기사 30명, 중요 연기자 30명 정도로 26년간에 150여명이 전반기사(前半期史)를 엮어 내었던 것이다. 일인당 작품관여편수를 부문별 평균직으로 보면 극영화의 경우 26년간에 감독한 사람이 3.2편, 각본이 2.7편, 촬영기사가 4.6편, 연기자가 3.3편 꼴이 된다.


이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민족적 수난의 기록이며 실로 준험(峻險)한 형극(荊棘)의 길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