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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의영화이야기

[8]한국영화의역사- 1950년대

by 형과니 2023. 5. 26.

[8]한국영화의역사- 1950년대

영화계에도 6 · 25전쟁 후에는 많은 변모가 있었다. 전쟁을 피해 부산 대구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 영화인들은 공보부가 있는 부산에 많이 몰렸다. 그들은 시류(時流)에 맞춰 반공전쟁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가령 한형모(韓瀅模) 감독의「정의의 진격」이라든가 임운학(林雲鶴) 감독의「진격만리(進擊萬里)」, 윤봉춘(尹逢春) 감독의「서부전선」「오랑캐의 발자취」,방의석(方義錫) 감독의 문화영화「육군포병학교」등이 그것이다 [註22]

 

그렇다고 목적영화만 나온 것은 아니다. 이빈화(李嬪華)를 발탁하여 만든 윤봉춘 감독의「성불사(成佛寺)」라든가 이규동(李圭東) 감독의「귀향(歸鄕)」, 이흥만(李興萬) 감독의「청춘」등 극영화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전쟁휴머니즘을 밑에 깐 작품들로서 예술성이 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전쟁와중에서의 혼란과 정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영화평론가 이영일(李英一)은 다음과 같이 썼다.

「결국 1950년에서 1954년까지 동란기의 한국영화는 이와 같이 전란의 불우한 환경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만큼 바로 눈앞에 있는 다급한 환경 아래서 이 국가의 존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한 싸움에 카메라를 들고 참전했다. 그러면서도 극영화 부문의 부진상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현실이나 인간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공간적인 퍼스펙티브가 있어야 했다. 때문에 그것은 다만 절박한 현실의 피부를 스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형상화하지 못했다. 광복 후의 혼란한 과도기와 연달아 일어난 동란의 황폐,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인간의식이나 사회성이 필름에 형성되기 위해서는 다음 시기에 넘어가야만 했다.」 [註23]

그러나 그런 전란 속에서도 다수의 신인들은 등장하였다. 가령 이경천(李康天) · 정창화(鄭昌和) · 류두연(劉斗演) 등의 감독과 조진구(趙眞求) · 황영빈(黃瑩彬) 등의 시나리오작가, 그리고 박암(朴巖) · 이빈화 · 이민(李敏) · 이택윤(李澤畇) · 이민자(李民子) · 윤일봉(尹一峰) · 윤인자(尹仁子) 등의 배우가 그들이다


전후의 외화(外畵)는 미국영화 일변도에서 벗어난 것이 특징이었다. 즉 프랑스 · 이탈리아 영화가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영화는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인 영화와 초현실주의 영화가 들어와서 과거 드뷔뷔에 감독의 낭만주의(浪漫主義) 영화를 극복했고, 이탈리아 영화는 주로 전후의 신사실주의가 판을 쳤다. 가령 프랑스 영화로는 크루소 감독의「정부(情夫) 마농」이라든가「공포의 보수」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이탈리아 영화로는 로세리니감독의「무방비도시」「자전거도적」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영화가 소외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다수를 점유했는데 이 시기의 명작으로는 진네만의 「하이눈」이라든가「지상에서 영원으로」, 마빈 르로이의「마음의 행로(行路)」, 윌리암 와일러의「우리 생애(生涯) 최고의 해」, 죠지 스티븐슨의「젊은이의 양지(陽地)」, 에리아 카잔의 「워터 프론트」등을 들 수 있다. [註24]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화는 인텔리층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가령 프랑스 감독으로서 알렉상들 아스트류끄라든가 로베르 브렛송, 루이 말, 아랑 레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소위 프랑스에 있어서 누벨 바그파라고 불리는 전후(戰後) 신인들이었다. 누벨 바그의 젊은 감독들은 대개 까이에 · 드 · 시네마지의 비평가와 그 주변인물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전전(戰前)의 낡은 허구에 의한 로망과 윤리를 대담하게 벗어 던졌다. 재흥하는 유럽의 새로운 풍조와 함께 이들은 부리짓드 · 바르도나 잔느 · 모로 등의 스타를 만들어 내어 일상생활 속에서 행동의 사실성과 모험성을 찾아 나섰다. 때문에 영화의 형식에도 혁신적인 신풍을 불러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러한 영화는 1960년대 후반에 가서 우리나라 영화의 청춘물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註24]


이상과 같은 외화의 경향 속에서도 1950년대의 우리 영화는 큰 변화가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진부한 멜로드라마(Melodrama)만이 양산(量産)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육백년사]